花雲의 詩/화운의 詩 4 99

꺼지지 않는 촛불/<상사화>

꺼지지 않는 촛불 어렴풋이 스쳐가듯 만났던 두 사람 언젠가는 한번쯤 보고 싶었다지만 헤어진 지 20년이 지나 언뜻 만났다 먼발치에서도 한눈에 알아본 익숙한 모습 흘러간 세월만큼 바래버린 머리칼이 바람처럼 건너온 시간들을 비추고 있었다 서로의 가슴 뒤 편 꽁꽁 잠가두었던 문을 슬며시 열어보면 언제든지 촛불처럼 타고 있었다던 그 20년을 거듭 흘려보내고 이따금씩 아프게 들여다보는 깊숙한 방 꺼지지 않는 촛불은 지금도 빛나고 있을까 2011.07.14 시집 게재

비 오는 날은

비 오는 날은 비 오는 날은 책 읽기 좋은 날 들리는 건 하늘에서 쏟아 붓는 물소리뿐 듣고 싶지 않은 소음 모조리 쓸어 흘려 보내주기 때문인지 비 오는 날은 음악 듣기 좋은 날 수금을 타듯 장단 맞추는 빗방울 따라 또닥또닥 따다닥 똑 따다닥 물 위에 실려 가는 가락이 흥겨워선지 비 오는 날은 편지 쓰기 좋은 날 보여주고 싶어도 망설이던 젖은 마음 오늘만은 속속들이 헹궈내어 소쿠리에 건지듯 담을 수 있어서인지 비 오는 날은 차 마시기 좋은 날 눈에서 혀 끝으로 감돌아 가슴으로 스며드는 꽃물 같은 향기 스쳐온 시간 속으로 날아갈 수 있어서인지 비 오는 날은 무얼 하든지 마음껏 젖을 수 있어서 좋다 2011.07.07

제자리

제자리 머리를 감으려고 물을 적신다 머리칼에 물을 충분히 묻히고 욕조 옆에 나란히 세워둔 플라스틱용기에서 적당량의 샴푸를 꾹 눌러 짠다 두피에 발라 거품을 내려고 문지르자 거품이 나는 게 아니라 미끈거리는 헛손질 어라! 이건 샴푸가 아니었나? 생긴 모양이 똑같아서 겉에 쓰여 있는 품목을 잘 읽었어야 하는데 제품의 위치가 바뀌어져 있는 걸 몰랐다 샴푸를 하고 난 다음에 린스를 하기 때문에 순서대로 놓여있으면 눈을 감고도 머리를 감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는데 청소하는 중에 바뀌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무엇이든 원래 있던 그 자리 그대로 있어야 이리저리 찾느라 허둥댈 일도 없고 사용하고 난 후 제자리 제대로 두기만 하면 눈 따가워 물로 헹궈내지 않아도 될 텐데 나 있어야 할 곳에 나 있고 너 있어야 할 곳에 너 있..

장대비

장대비 누가 무거운 짐을 지고 살게 했는지 근심 걱정 쌓이는 세상살이 버거워 펑펑 흐느끼며 무너져 내립니다 아무데나 떨어져 미끄러지다가 벌건 황토 뒤집어쓰고 쫓기다시피 떠내려가는 알 수 없는 길 누가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면 땅 아래 깊은 곳으로 가겠다고 말하렵니다 거기서 무얼 할 거냐고 물으면 밑바닥에 깔리는 앙금을 걸러 정결한 샘물로 새로 태어나겠다고 말하렵니다 또 다시 누가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면 큰 강물 따라서 바다로 가겠다고 말하렵니다 거기서 푸른 물결 타고 춤을 추다가 한 점 구름처럼 가벼이 날고 싶어 눈부신 하늘로 높이 올라가겠다고 말하렵니다 2011.06.29

별로 지다

별로 지다 푸른 오월 눈부시게 피어났던 꽃들은 한 시절을 누리고 어디로 가나 발 저리도록 걸어온 길 위에서 하염없이 연약한 뿌리 내리며 새 순 돋우려 뻗어가던 날들이 얼마였는지 꽃 한 송이 피우려 서럽게 기다리던 날 때로 궂은 비 내려도 쾌청한 날 있어 좋았지 외로움에 떨며 울던 밤에도 밤하늘의 달빛은 따사롭기만 했다 벌 나비들 몰려와 그렇게 많은 사랑을 갈구했어도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순간은 진정 짧기만 해서 노을 번지는 하늘 몸서리치게 껴안으며 꽃 그림자 비춰주던 연못 위에 향기로웠던 봄날의 젊음 눈물 어린 별로 지다 2011.06.01 거제도 산방산 비원에서

유수여정(流水餘情)

유수여정(流水餘情) 청량하기 그지없는 물줄기를 만나고자 첩첩 산중 계곡으로 찾아갔더니 보자마자 순식간에 스쳐가 버리네 다시금 만나고자 기다리고 있으려니 오자마자 저만치 멀어져 가버리네 보내고 싶지 않아 곁에 두고 싶다 해도 제 목소리 내지 못해 검푸른 속앓이로 썩어가는 웅덩이를 차마 볼 수 없을 테니 바위틈새 청아하게 울려주는 물소리를 등 너머 귓전으로 듣기만 하라 하네 2011.06.18 강원도 영월군 법흥계곡에서

나비를 접는 여자

나비를 접는 여자 전철의자 맨 끝 구석자리 알록달록 색동 리본을 한 뼘씩 잘라 작은 고를 만들어 나비를 접고 있는 여자 중년으로 넘어가는 펑퍼짐한 몸매지만 손놀림은 날렵해 몇 바퀴 재주를 부리더니 금새 손끝에서 날개를 펴고 팔랑거린다 한 마리, 두 마리, 수십 마리…… 불과 몇 초 만에 한 마리씩 태어나는 나비를 신기한 듯 바라보는 승객들의 시선을 따라 내내 침묵하던 객차 안은 꽃 피는 정원이 되어 가는데 분주한 하루의 교차점에서 동서남북 사방으로 날아가는 마음의 나비들…… 제각기 빛나는 꿈을 작은 날개에 실어 쉴 새 없이 부화시켜 허공으로 날려 보낼 때 중년의 고단한 가슴에도 아련한 꽃 무지개 걸린다 2011.06.07

엄마를 부르는 소리

엄마를 부르는 소리 한가로운 휴일 아침 달콤한 늦잠에 빠져 있을 때 어디선가 목 놓아 울부짖는 소리 꿈결에서도 가슴 저미는 소리인지라 가물거리는 시간 속으로 거슬러 올라간 우리 아이가 나를 애타게 부르는 줄 알았다 엄마! 엄마아! 엄마아아! 엄마아아악……! 절박한 울음소리는 점점 비명이 되어 내 귀를, 골목을, 우리 집 창문을 두드려댔다 잠든 애를 홀로 두고 집을 비운 사이 깨어보니 아무도 없어 놀란 옆집 아기가 베란다에 매달려 새파랗게 질려 떨고 있는데 세상에서 처음으로 포근한 하늘이 날아가 버리고 믿음직한 땅이 숨어버리는 무서운 날이 되었던 것이다 언젠가 어린 딸한테 캄캄했었을 그 하늘이 저리게 스쳐갔다 2011.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