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雲의 詩/화운의 詩 4 99

삶의 여정/ 1

삶의 여정 샘솟는 물일지라도 거친 자갈길을 흘러가지 않으면 시냇물이 될 수 없고 시냇물이 낮은 밑바닥을 쓸어주지 않으면 긴 강물이 될 수 없고 강물이 끝없는 너울을 넘어가지 않으면 저 푸른 대양이 될 수 없다 하물며 사람아! 제 눈에 보이는 하늘만 바라보고 제 딛고 있는 땅 위에만 서있으면 강이 굽어져 넓어지고 산이 깊어져 높아짐을 어찌 알리! 넘어지고 찢어지는 생채기 없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음을 어찌 알리! 2011.06.02 시집 게재

그 섬에 가고 싶다

그 섬에 가고 싶다 검푸른 바다 위로 통통거리는 유람선 아랑곳없이 바위틈에 물개들 햇볕과 놀고 있는 그 섬에 가고 싶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어 애타게 바라보는 인당수 건너 북녘 땅 울며 나는 갈매기만 오고 가는 그 바다에 가고 싶다 파도치는 물결 따라 매끄러운 콩돌의 노랫소리 정겨운데 말없는 두무진(頭武津)의 석상들이 웅장한 그 벼랑 위에 가고 싶다 아! 멀리 있어도 그림인 듯 떠오르는 그리운 모습 짠 내음으로 일궈가는 삶이 오붓한 그 섬에 다시 가고 싶다 2011.05.31

수국(水菊)/<물도 자란다>

수국(水菊) 온 세상이 초록으로 물들어갈 때 나는 오월의 신부를 위한 한 묶음의 꽃다발이 되겠습니다 꽃송이 하나하나에 정결한 아름다움을 수줍은 걸음걸음에 순결한 믿음을 마주잡은 손길에 진정한 기쁨을 함께하는 모든 것에 온전한 채움을 풋풋한 열망이 무지개처럼 아롱질 때 나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한평생 성스러운 언약이 되겠습니다 2011.05.25 시집 게재

아래로 피는 꽃/<물도 자란다>

아래로 피는 꽃 꽃 피는 사월이 녹음 속에 묻히고 푸르름이 땅을 덮는 오월이 되면 아카시아, 때죽나무, 은방울꽃…… 겸손하게 고개 숙인 꽃들이 핀다 하늘 향해 피어나는 꽃이야 저마다 해를 보며 꽃잎 펼치지만 향기로 마음을 사로잡는 꽃 작은 가슴으로 더없이 깊은 내음 전하려 그 고개를 아래로 기울인다 화사하게 보여줄 낯은 아니어도 바람을 쓰다듬듯 햇살을 어루만지듯 어두운 곳에 불 밝혀주려고 낮은 곳에 향기 보내주려고 조롱조롱 꽃등 흔들어 그윽하게 흐른다 얼굴을 들지 않고도 빛을 내는 꽃... 2011.05.23 시집 게재

버스정류장

버스정류장 강변行 버스는 오분 후 도착예정 청량리行 버스는 십분 후 도착예정 버스정류장에 서 있으면 도착할 버스시간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어디 그뿐인가 어디쯤 오고 있는지 미리미리 알려주니 애태우며 시계를 자꾸 들여다 볼 일이 없다 목적지를 향한 버스가 언제쯤 태우러 올 지 시시각각 알려주니 기다림이 전혀 지루하지도 않다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진로를 바꾸고 새로운 일을 해야 할 때 꼭 하고 싶은 일을 요렇게 조렇게 하면 실패하지 않는다고 속 시원히 알려주는 전광판 하나 있음 좋겠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할 때도 목적지만 정해 놓으면 가야 할 시간을 척척 알아서 계산해주면 좋겠다 2011.05.15

내가 사는 세상

내가 사는 세상 이 세상 사는 동안 슬픈 일이 있더라도 내일이 있기에 견디게 되고 아쉬운 이별을 하게 되더라도 또 다른 만남을 기대하게 된다 실패하는 일이 있더라도 다시 도전할 수 있으니 희망적이고 종종 보게 되는 죽음이 절망적이어도 새로운 탄생이 있어 더없이 귀하다 적지 않은 손실에 마음 상하게 되더라도 다시 회복함으로 위로받게 되니 아픔이 있더라도 감사하지 않은가 용서함으로 미움을 버리고 사랑함으로 고통을 감당케 하시니 고난이 있더라도 아름다운 세상 다시 산다 해도 물처럼 아래로 흘러서 더 높은 곳을 바라보며 담담히 살리 2011.05.01

콩돌해변

콩돌해변 인고의 세월도 구르고 구르면 저렇게 반들반들해지나 보다 거센 파도에 씻겨 매끌매끌해질 때까지 바다에 쏟았을 눈물 얼마나 될까 모난 구석 다 닳도록 구르던 날들이 알알이 콩돌로 쌓였나 보다 밀물 썰물 들고나는 기슭에 밀려와 젖은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가 비단결이다 2011.05.07 * 콩돌해변:콩알처럼 매끄러운 자갈이 깔린 백령도해변

초록 쓰나미

초록 쓰나미 뾰족뾰족 새순이 돋을 때는 찰랑거리는 여울로만 보이더니 가지 끝에 한껏 펼쳐 든 잎사귀 너울거리는 파도처럼 춤을 춘다 봄을 통째로 삼켜버린 신록의 물결이 짙푸르게 우거진 능선을 넘어오면 머지않아 찌는 듯한 여름을 몰고 오겠지 초록 바다로 밀려와 그 발아래 드넓은 대지를 정복하고 말 것이다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밀려드는 공포의 쓰나미 거친 물바다가 쓸고 가는 벌판에는 모든 것이 부서져 폐허가 되고 말지만 푸른 녹음의 쓰나미가 덮쳐오는 싱그런 숲 속 울창한 나무들이 쏟아내는 생생한 숨결은 거대한 생명의 바람으로 힘차게 일고 있다 2011.05.04

한지(韓紙)

한지(韓紙) 거친 비바람 맞고 자란 닥나무가 기품 있는 화선지로 다시 태어난다면 더 바랄 영화가 없지 태어난 지 일 년도 살만큼 살았다고 팔다리 잘리고 끓는 가마솥에 들어가 숨 넘어갈듯한 수행을 거쳐야 하네 달궈진 몸 식기도 전에 품어온 속내 드러내도록 발가벗겨져 이겨지고 다져져도 거듭나는 길은 멀기만 한데 잿물에 잠겨 고행을 마치면 그제야 깃털처럼 가벼워지려나 끈질긴 염원 풀어내고 또 풀어내도 한껏 날아오르기엔 여전히 무겁기만 하네 오랜 기다림마저 뜨거운 다림질로 말끔히 펴서 반듯하고 매끄러운 마음의 길을 내면 마침내 명인의 손길 앞에 다다를 수 있으려나 2011.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