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雲의 詩/화운의 여행詩 59

황제의 유산

황제의 유산 중국 산시성 시안에 가면 비밀스러운 언덕 큰 무덤 안에 위대한 황제가 잠들어 있다 이웃 땅을 무참하게 정벌하여 자신의 나라로 속박해버린 무적의 침략자 수많은 병마용을 거느리고 지금도 지하왕국을 지배하고 있다 영원한 암흑 속에서 불멸의 생을 누리며 어둠의 세계까지 정복하고 싶었는가 밝은 세상에 드러난 용병들이 호흡마저 사라진 토굴을 헤치고 나와 폭군의 야망으로 죽어간 그들 대신 태양 아래 살아가는 후손을 살리고 있다 2018.11. 진시황 무덤에서

두 배의 기쁨

두 배의 기쁨 강아지들만 집에 남겨두고 여행 갔다가 돌아오는 날 집으로 향하는 길목에 다다랐을 즈음 귀엽고 착한 이름을 불러본다 똘아! ~~~ 설아! ~~~ 여러 날을 저희끼리 의지하면서 주인 오기를 눈 빠지게 기다렸을 아이들 멀리서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네 발에 고속엔진을 달아놓은 듯 속도제한 없이 달려와 품에 안긴다 그동안 한 마리만 있었다가 새로 들어온 업둥이까지 따라서 반기니 기쁨이 두 배로 늘어난다 2018.05.30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

레닌그라드 가는 길

레닌그라드 가는 길 에스토니아 탈린을 떠나 국경을 넘어 상트페테르부르그로 가는 길 러시아에 입국하려면 출입국심사를 받아야 하는데 우리 차례가 되더라도 본국의 대형차량이 진입하면 자국민을 우선적으로 통과시킨다 그러면 우리 순서는 뒤로 밀려져 그들이 끝날 때까지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던 중 직원 한 명이 퇴근한다고 자리를 떠나고 지체되는 시간은 자꾸 길어져만 간다 여권을 걷어가고 한정 없이 기다리게 하더니 짐을 들고 건물 안으로 들어오란다 지루함의 끝자락에서 겨우 도장을 받은 후 드디어 삼엄한 구역을 빠져나간다 오랫동안 지배당하고 통제받았던 그들의 엄격함이 여행객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순간이다 2018.05.28 러시아에 입국하면서

황혼

황혼 깊은 산중 작은 오두막 노부부가 테라스에 앉아 있다 따스했던 햇살이 기울어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시각 경쾌한 노래를 불러주던 새들은 제 집으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계곡을 굴러가는 물결만이 적막함을 달래주듯 재잘거린다 젊음은 더 이상 머물러 주지 않고 산마루를 둘러싼 만년설만이 오랜 친구처럼 눈을 마주치는데 빛바랜 의자에 나란히 앉아 해묵은 사랑을 다독이는 백발의 연인들 자작나무 사이로 붉어가는 석양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2018.05.24 노르웨이 갈라로 가는 길에서

구부러진 나무

구부러진 나무 해발 1500미터 높은 산 아래 키 작은 자작나무들이 하얗고 가녀린 몸을 웅크리고 있다 해마다 겨울이 오면 제 키보다 서너 배의 높이로 쌓여가는 설빙 때문에 팔 다리를 펼 수도 없고 허리까지 구부리고 있어야 한다 길고 긴 겨울 동안 짓눌려 사무치게 떨고 있어도 봄이 오면 고개를 들어 구겨졌던 가지에 새싹을 돋운다 수만 년이 지나도록 핍박받으면서도 목숨을 부여잡고 있는 그들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삶의 의지가 새하얗게 얼룩져 있다 2018.02.24 노르웨이 달수니바전망대에서 내려오는 길에

마음속에 거는 그림

마음속에 거는 그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아름다운 베르겐으로 가려면 오십 개가 넘는 터널을 지나야 한다 먹이를 낚아채듯 검은 목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올 때면 - 산과 산 사이 우뚝 솟은 만년설 - 수십만 년의 빙하가 흐르는 계곡 - 너른 대지 위에 비집고 서 있는 자작나무숲 - 잔잔한 호수에 비치는 빨갛고 하얀 집 - 푸른 언덕에서 뛰노는 양떼들 … … … 동굴 하나씩 지날 때마다 기다리던 연인이 돌아오듯 꿈속에서 그려 보던 그림들이 어둠을 헤치고 마음속에 걸린다 2018.05.23 베르겐으로 가는 길

날짜변경선

날짜변경선 핀란드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스웨덴으로 간다 거대한 크루즈에 올라 비좁은 선실에 집을 풀고 뱃머리에 기대어 일몰을 본다 황금빛 바다에 몸을 숨기는 태양을 내일은 동쪽에서 반갑게 다시 만날 것이다 작은 이층침대에 몸을 누이고 노곤한 꿈속을 헤매는 동안 친절하고 다정한 *돌고래[SILJIA]는 밤새도록 낯선 항구를 향해 달려간다 얼마간 눈을 붙였을까 죽은 듯 달게 자고 있는 사이 긴 시계바늘이 한 바퀴 뒤로 돌아가 있다 아무 것도 부탁하지 않았는데 고단한 여정에 주어진 한 시간의 선물이다 2015.05.22 스웨덴으로 가는 크루즈에서 *배의 이름: SILJIA

방선(訪船)일기

방선(訪船)일기 바다에 떠다니는 섬 30만 톤 유조선이 한국으로 온다기에 차를 몰아 정유공장 선착장으로 달려간다 출렁이는 통통배에 흔들리며 외항으로 나가야만 바라볼수록 아득하게 다가오는 배 아찔한 사다리에 매달려 뱃전에 오를 때면 오금저리는 발아래 요동치는 파도가 아우성이다 페인트 냄새 코를 찌르는 갑판을 지나 차디찬 철통 선실에 들어서면 바닥으로부터 천정까지 울려오는 거대한 엔진소리 살가죽 속으로 내장까지 떨리는 기계소음에 심장 깊숙이 뜨거운 못이 박힌다 휴식시간이 되어야 만나볼 수 있는 모습 헬멧 아래 가려진 얼굴은 시커먼 기름투성이 목에 두른 두툼한 땀수건이 쥐어짜면 흥건하게 물이 흐를 듯하다 검푸른 바다에 묻어버린 화려한 청춘 야망의 세월은 수평선너머로 스러져 가고 향수에 젖은 선원의 피와 땀으로..

몰운대(沒雲臺) 파도소리

몰운대(沒雲臺) 파도소리 동쪽 바다가 밀려서 오면 서쪽 바다가 따라서 오고 한쪽에서 모래를 씻으면 다른 쪽에서 몽돌을 굴린다 파도를 따라 달려온 바다는 온몸으로 굴러도 절벽에 오를 수 없어 온갖 세월 지나도록 검푸르게 젖은 마음 바윗돌에 속속들이 새겨 놓는데 소나무 언덕을 향해 구르다가 하얗게 부서지는 서러움이 보이는가 멈추지 않는 노래 들려주려면 에는 바람 줄기차게 불어도 좋겠지만 저 섬 그늘에 잠잠히 붉은 구름 깔리거든 쉰 목소리나마 편안히 잠들 수 있기를...... 2015.01.01 (시 6에서 옮겨 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