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雲의 詩/화운의 詩 4 99

헛짓

헛짓 전라도 두메산골 늙어 꼬부라진 순창할멈은 효자 아들 먼저 보내고 홀로 사는 하루하루가 서럽고 낙이 없단다 누가 오라 고를 하나 가라 고를 하나 인생이 헛짓이고 사는 게 헛짓이란다 나무토막은 장작 패서 불이라고 지피지 죽어버린 아들은 아무 소용이 없단다 안마당에 심은 완두콩은 뻗칠 대로 뻗어 콩알 잘도 품었는데 툇마루에 누워 올려다보는 시퍼런 하늘 늙어 쭈그러진 가슴 베려고 날을 세워 노려보고 있단다 시집간들 무엇 하나 아들난들 무엇 하나 서방은 병들어 죽고, 아들은 사고로 죽고 혼자 먹는 끼니가 입 안에 돌로 굴러 하늘을 쳐다봐도, 땅을 걸어봐도 바람 없는 먹장이고 햇볕 없는 사막이란다 사는 동안 남은 것이 없어서 남길 것도 가져갈 것도 없단다 2011.06.08

이 세상에 있는 것 #/<물도 자란다>

이 세상에 있는 것 나의 생명은 내 것 아닌 이 세상의 생명이요 이 세상에 있는 것 또한 내 것 아닌 모두의 것 풀의 몸으로 돋아나는 새싹 향기로운 미소로 피어나는 꽃들 풍성하게 열매 맺는 과실 천지를 밝혀주는 눈부신 태양 서산마루 금빛으로 물들이는 시간 바위틈에 솟아나 바다로 향하는 샘물 때에 따라 대지를 적셔주는 비 사방으로 불어주는 신선한 바람 이 땅이 평안하거나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스스로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리고 나눌 것을 아낌없이 나눌 수 있는 것은 어느 것도 소유하고 주장할 것이 아무에게도 없음을 알게 하려 함이니 오늘 하루 값없이 주어지는 순간들은 하늘의 자비로운 축복이요 땅에 내리는 평화임을 귀하게 여기고 힘써 가꾸어 지키게 하려 함이라 2011.10.01 시집 게재

후회

후회 한 사람을 미워했습니다 사랑할 땐 같이 있기를 열망하여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았지만 어긋나는 마음 깊어질수록 갈등의 골은 좁혀질 줄 모르고 말 한마디, 손짓 하나까지 뼛속을 쑤시는 듯 고통스럽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게 미워만 하다가 중천에 떠서 작열하는 태양도 칠흑 속으로 잠길 때가 있는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미운 사람 사라진다면 날개를 달고 자유를 기뻐하는 것은 잠시뿐 울타리가 되었던 든든함을 보지 못하고 종잇장 말리듯 사라진 하늘을 찾아 흔들리는 땅 위에서 허둥거릴 때 절망스러운 순간이 얼마나 막막하게 될 지 그때가 두려워졌습니다 2011.09.30

고향으로 가면/ 1

고향으로 가면 나이 육십 되도록 세상을 견디고 이기느라 들꽃이 손을 흔들어주어도 반갑다 웃어줄 줄 몰랐지 가파른 고갯길 따라 숨차게 오르고 돌아가느라 외롭게 돋아난 풀 한 포기 가엾다 쓰다듬어줄 줄도 몰랐지 삭막한 도시 무정한 길 위에서 언 뺨을 때리는 냉혹한 시련에 원망하며 울기도 했지만 서럽던 계절 떠나고 따스한 봄날 연둣빛으로 피어나면 흙냄새 풀썩거리는 시골로 내려가 꽃과 함께 살 거야! 풀과 함께 살 거야! 2011.09.27 시집 게재

고장 난 시계처럼

고장 난 시계처럼 울적한 가을날 오후 불현듯 시간이 멈춘다면 혼자 영화관에라도 가고 싶다 웃기는 영화를 보면서 어두운 구석에 숨어 훌쩍거리며 참담했던 그때로 다시 돌아가 속이 풀릴 때까지 욕해주고 머뭇거리며 담고만 있던 말들 거침없이 쏟아버리고 난감하고 어지러웠을 그 기억을 눈물 어리는 영상 속에 몽땅 묻어버리고 싶다 실컷 울고 나서 앙금으로 남았던 분이 좀 풀리면 퍽퍽해진 가슴 소프트아이스크림으로 적시며 고장 난 시계처럼 그 자리에 멈춰 있고 싶다 2011.09.20

그저 그대로

그저 그대로 1. 공기는 자랑하지 않습니다 물은 오만하지 않습니다 구름은 난폭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대로 흐를 뿐입니다 2. 불꽃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꽃잎은 오만하지 않습니다 안개는 난폭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대로 피어날 뿐입니다 3. 햇빛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달빛은 오만하지 않습니다 별빛은 난폭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대로 비춰줄 뿐입니다 4. 새는 자랑하지 않습니다 물고기는 오만하지 않습니다 나무는 난폭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5. 자랑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오만한 자가 누구입니까 난폭한 자가 누구입니까 그는 바로 사람입니다 2011.09.12

나무는 제 멋대로 춤추지 않는다

나무는 제 멋대로 춤추지 않는다 낮이나 밤이나 더우나 추우나 나무는 제 멋대로 춤추지 않는다 바람이 찾아오지 않는 동안엔 한마디 소리내지 못하다가 저만치 시원스런 움직임이 보이면 알아보고 제풀에 겨워 휘적거리는 스스로 서서 떠나지 않고 죽을 때가 되어도 선뜻 눕지 않아 죽고 나서 팔다리 잘려나가 이리저리 몸통 깎이고 저며진 후에야 제 맘에 바라는 대로 춤추고 떠들며 바람 따라 떠나고 싶어한다 2011.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