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雲의 詩/화운의 詩 7 100

대리모(代理母)

대리모(代理母) 비탈진 밭둑에 늙은 고욤나무가 서 있다 오래 전부터 반기는 이 없이 서 있지만 해마다 소복한 열매는 맺는다 말랑말랑 익으면 까맣게 말라버릴 때까지 떨어지지 않고 새들의 먹이가 되어준다 감나무는 새끼를 낳지 못한다 잘 익은 홍시의 씨앗을 땅에 심어도 태어나는 나무는 감을 맺지 못한다 어린 고욤나무 기둥을 어슷 잘라내어 그 자리에 감나무 새 가지를 붙여 싸매주면 어느 사이에 상처가 아물어 한 몸이 되어 자라난다 뿌리는 고욤나무지만 새로 뻗는 가지는 감의 어미가 되어 크고 노란 과실을 맺기 시작한다 제 몸을 내어주고 키우는 새 생명이다 2091.12.04

사랑과 전쟁

사랑과 전쟁 이 세상에는 사라지지 않는 역사가 있다 그 하나는 전쟁이요 다른 하나는 사랑이다 사랑으로 하여금 끊임없는 생명이 태어나고 탐심으로 하여금 뺏고 뺏기는 싸움이 벌어진다 그러지 않으면 삶의 의미는 무기력해질 것이고 변화와 발전은 일어나지 않게 될 것 다툼과 애정으로 이루어지는 인류의 역사 사랑과 전쟁이야말로 이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2019.12.01

사마귀 돋을 때

사마귀 돋을 때 눈 가에 돋아난 사마귀 하나 세월에 눌린 주름살 깊어지듯 하루하루 굳건히 자리잡아 가고 있다 원치 않는 근심 하나 애써 삭이면 뿌리 밑에서 올라오는 곁가지처럼 잡아 뜯고 떼어내도 다시 생겨 쓸모없는 잡동사니로 자라고 있다 한복판에 보란 듯이 솟아나지 않는 건 불행 중 다행 어쩌든지 복점이라도 되어주면 아침저녁 기름칠을 해주어도 마땅하련만 그럴 입장은 아니었는지 한구석 흰 머리칼 사이에 숨어 문득문득 잊고 살았던 경각심을 깨우고 있다 지금 무슨 생각을 짓고 사는지 날마다 그 얼굴을 들여다보아라 표정에 새겨지는 모양새로 살아가는 속사정 모두 읽을 수 있다고 절대 지워지지 않는 표식이 되어 하루하루 성가신 잔소리를 해대고 있다 2019.11.29

미인의 조건

미인의 조건 고양이는 선천적으로 자신이 예쁘다는 것을 안다 앙증맞고 요염하게 생겼지만 사뿐사뿐 도도하게 걸으며 음식도 입맛 따라 골라먹고 말과 행동이 앙칼지면서도 애교스럽다 그뿐인가? 자기 배설물을 눈에 띄지 않게 처리하고 틈만 나면 외모 가꾸기에 여념이 없다 예쁜 사람은 본능적으로 남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안다 타인이 호감을 갖거나 친절하고 관대하게 대해주는 것에 익숙하다 상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자제하는 경향이 있지만 남다름을 인정받기 위해 실수하는 것에 민감하기도 하다 때때로 교만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장점을 인식하고 있는 만큼 자기 관리에 태만하지 않으며 보다 나은 모습을 가꾸기에 늘 부지런하다 2019.11.17

불행

불행 살아가면서 어느 순간 원치 않게 어긋나는 일이 생기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못된 놈이 있다 도둑같이 몰래 들어왔어도 티 안 나게 다녀가면 다행인데 도대체 그놈에겐 자비란 찾아볼 수가 없다 야비하고 잔인해서 겪고 싶지 않은 분란을 일으키고 자꾸 눈앞에서 따가운 연기를 피워 올린다 얼마나 버틸 수 있나 인내심을 시험이라도 하듯 마땅히 피할 길도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거기에 이해라는 꼬리표를 달고 절망스러운 눈물을 강요할 때면 하는 문이 닫힌 것을 원망하는 수밖에 그래도 지독히 도전적인 상대에겐 무릎을 꿇을 수도 있을 테니 포기할 수 없는 투지에 두 손 들도록 머뭇거리지 말고 차내 버릴 일이다 다시 다가와도 절대 물러나지 말 일이다 2019.10.25

겨울에 쓰는 수상록

겨울에 쓰는 수상록 봄은 환희였습니다 언 땅을 헤치고 솟아나는 새싹들이 따스한 바람을 기다리고 있을 때 골짜기를 달리는 개여울은 갈 길이 멀어도 쉴 수가 없습니다 햇살을 향하여 손을 뻗는 꽃대에게 빛나는 미래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여름은 전쟁이었습니다 질긴 목숨을 키우기 위해 천둥 같은 시간을 버텨야 했습니다 세찬 비바람과 타는 불볕 아래서 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 끈질기게 맞서야 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가을은 축복이었습니다 땀으로 길러낸 열매와 씨앗들을 아낌없이 내어줍니다 어미에게 달려있던 탯줄을 끊어내며 부족함 없이 나누는 넉넉함은 감사와 기쁨의 축제가 됩니다 겨울은 돌아갈 때입니다 동요하는 마음 없이 천천히 모두 벗어버리고 깊은 잠에 들어야 할 시간 점점 온기가 떠나는 것을 알면서도..

하루의 길이

하루의 길이 누구는 인생을 일장춘몽이라 하는데 누구는 하루가 너무 길다 한다 똑같이 주어지는 하루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길어지기도 하고 짧아지기도 한다 짧다는 것은 재미있어서 끝나는 게 아쉬운 경우이고 길다는 것은 해도 해도 끝나지 않아 지루한 경우이다 살면서 하던 일을 미뤄야 할 때도 있고 포기해야 할 때도 있지만 해야 할 일은 미루지 말아야 하고 해서 안 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하루의 길이는 늘리든지 줄이든지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다 2019.10.26

부고(訃告)

부고(訃告) 그녀가 떠났다 며칠 전 낯선 전화번호로 얌전하고 고운 사람이 임종을 준비한다는 문자가 왔다 핸드폰에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어 실례가 될지 모르지만 어머니의 소식을 전한다고 한다 내려앉는 가슴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이어서 마지막 소식이 날아왔다 가깝게 지낸 사이는 아니었지만 조용하고 상냥한 모습 몸에 배인 우아한 성품이 언제나 부드럽게 드러나는 여인 일찍이 마음 나누지 못한 것이 때늦은 후회로 밀려온다 살아오는 동안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손에 받아든 맑은 홍시를 그만 놓쳐버리고 만 것 같아 갑작스런 비보에 눈 앞이 흐려진다 머리 숙여 고인의 명복을 빌며 언젠가 이승 떠날 때 누가 나를 애석하게 기억해줄까 2019.11.14

겨울 인사

겨울 인사 올 들어 갑자기 추워진 날 뒤늦게 피어난 꽃이 걱정되어 들여다보니 샛노란 꽃잎에 살얼음 앉아 피어 있어도 미소 지을 수 없게 되었다 가으내 허전해진 마당 밝혀주느라 쌀쌀해져도 찾아오던 반가운 손님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었지만 이젠 어쩔 수 없이 헤어질 때가 되었나보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매일매일 행복했어요! 우리 집까지 오느라 수고했어요! 그보다 더 좋은 인사가 없을까? 내년에 다시 오라고 기다리고 있겠다고 약속하고 싶지만 멀고 먼 겨울나라에서 언 발로 떨며 돌아올 걸음 생각하면 안쓰러운 마음에 입이 안 떨어진다 2010.11.19 시집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