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雲의 詩/화운의 詩 6 99

길 잃은 쇠똥구리

길 잃은 쇠똥구리 흙먼지 이는 시골길에 쇠똥구리가 쇠똥을 굴리며 간다 썩은 냄새 풍기는 오물이건만 그들에게는 목숨줄이다 앞다리는 땅을 밀고 뒷다리는 먹이를 밀며 거꾸로 공을 굴리는 모습은 무대 위 곰의 재주를 보는 것 같다 아슬아슬 버거운 짐을 옮기는 그들에게도 크나큰 장벽이 있다 주로 밤에 활동하는 그 곤충은 밤하늘의 은하수를 보고 방향을 알게 되는데 먹구름이 끼는 날이면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리게 된다 비라도 내려 우주의 불빛이 가로막히면 별들이 땅을 움직이게 하여도 집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한다 아주 작은 빛이라도 바라보지 않으면 우리도 길을 잃는다 2017.12.13 물 하천 해설가 양성교육에서

물도 자란다 */<물도 자란다> 표제시

물도 자란다 낮은 곳이 있으면 돌부리에 긁히며 내려간다 좁은 길을 헤치며 아래로 흐르는 것은 넓고 잔잔한 세상이 있기 때문 깃털보다 가벼워지면 무한 허공으로 날아간다 위를 향해 높이 오르는 것은 푸른 마을마다 떠도는 섬들이 있기 때문 누군가에게 눈물이 필요할 때 부서져라 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는 건 깊고 후미진 곳에 사랑이 부족해서인가 마른 땅을 촉촉이 적시고도 찬바람에 쫓겨 발이 시리면 만물이 떨고 있는 겨울 밤 날이 밝을 때까지 하얀 얼음심지를 돋운다 물은 그렇게 마음을 키우나 보다 2017.12.08 시집 표제

수목장(樹木葬)

수목장(樹木葬) 언젠가 죽으면 어떤 이는 천국에 가리라 믿고 어떤 이는 극락에 가리라 믿으며 어떤 이는 다음 생이 없다고 여긴다 각기 정한 믿음에 따라서 영영 떠나는 마음이나 남아서 보내는 마음이나 어쩌든지 좋은 곳에 가기를 기원한다 햇살 고운 언덕에 묻히든지 강물 따라 여울져 흘러가든지 연기보다 가볍게 날아가든지 아니면 나뭇잎의 숨결로 달리 살든지... 어디로 가든지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나가지만 수십 년, 수백 년을 하루 같이 사는 나무처럼 봄마다 꽃같이 피어나서 반가운 소식 기다리듯 눈비 맞으며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얼굴 다시 한 번 볼 수만 있다면 푸르게 서 있는 목숨으로 살아도 족하리 2017.11.28

강의 이름/<물도 자란다>

강의 이름 금강은 흘러가는 길목에 따라 호강 적등진강 차탄강 화인진강 말흘탄강 형각진강 적벽강 웅진강 백마강 고성진강 등의 이름으로 달리 불린다 사람도 생겨나서 자라는 동안 태아 신생아 영아 유아 어린이 청소년 청년 장년 노년에 이르기까지 어느 발원지에서 솟아나 끝없이 넓고 푸른 대양을 향하듯 강물 같은 생의 길을 걷는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이름을 부여받고 각별하고 귀한 염원을 담아 그 꿈을 키우는 강으로 흐를 때 상고해보라! 굽이굽이 순탄치 않은 여울을 돌아 과연 얼마나 스스로에게 합당한 이름으로 살고 있는지를…… 2017.11.02 물.하천해설가 양성교육 받으면서 시집 게재

마른 잎엔 이슬이 앉지 않는다/<물도 자란다>

마른 잎엔 이슬이 앉지 않는다 긴 밤이 지나고 새 아침이 오면 온 전신에 맺히는 땀, 그리고 눈물 하루하루 살아내는 일은 견디지 않고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 잘 가꾸어진 정원의 꽃잎 위에나 길 가에 있어 짓밟히는 이파리 하나에도 고요한 밤을 적시고 나면 따습게 떠오르는 햇살이 속으로 쌓인 노고를 씻어주고 설렘으로 빛나는 진주를 달아준다 또 하루를 살아야 하는 것은 생의 빛깔을 간직하기 위해 끝까지 멈추지 않는 수행의 오체투지 비우면서 자라가는 목마른 여정에서 일찍이 말라 쓰러진 잎새에는 한 방울의 물기라도 기꺼이 머물러 있어 주지 못한다 2017.10.30 시집 게재

행복해 보인다

행복해 보인다 살아가는 날들이 텁텁해지면 앨범 속에 묻어둔 사진을 꺼내본다 한 손에 펼쳐진 옛 풍경 속에서 누군가와 어깨를 나란히 때론 혼자서도 당당히 날마다 천국인 양 환하게 웃고 있다 우울한 시절이 있었기나 한 걸까 지금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벗들과 서로 그리워할 일도 없을 것 같이 나들이를 즐기고 있다 한 줄기 잔상으로 흐려진 추억 속에서 조금은 촌스럽게 보이지만 그땐 젊고 생생한 모습이다 고되고 서러운 날들이 아프기도 했으련만 그 순간만큼은 행복했었나 보다 2017.0915

망각

망각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으면 아마도 가슴 속은 붉은 피딱지로 굳어져버릴 지도 모른다 쌓여가는 기억들로 막혀버린 혈관들이 몸 속 구석구석 흐르지 못한 선혈을 터트리고야 말 것이다 그러니 참 다행이다 엊그제 겪은 일도 얼마간 지나면 사라져버릴 테니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구원의 한 방편이 되어 어쩌면 알고 당하는 억울함으로 분노에 발목 잡히게 되더라도 시종 괴로워하지 않아도 될 것을 다행으로 여기게 될 지도 모르겠다 2017.09.10

바람이 되어

바람이 되어 덧없이 살다가 미련 없이 이 세상을 떠나야 할 때가 오면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가게 될까 어떤 이는 양지 바른 언덕에 꽃처럼 피었다가 쓰러진 영혼을 묻고 어떤 이는 한 줌 재로 이별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푸른 나무에 기대어 또 다른 세상을 이어가고 싶어 한다 태어났으니까 살아가고 고독해서 울다 보니 떠내려 간 기억들 모두 추억할 수 없지만 부서질 만큼 아프고 쓰러질 만큼 흔들리면서 등불 꺼지듯 한 목숨 스러지고 난 후엔 땅 끝으로 흐르는 바람이 되어 누워 있는 풀들을 달리게 하고 고여 있는 물들을 춤추게 하며 낯선 골짜기에 맑은 숨결을 채우고 싶다 2017.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