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기다림 텁텁한 먼지를 일으키며 쇠톱을 가는 굉음 속에 전철이 지나쳐간다 한 대가 지나치고 또 스쳐가고 꼬리를 감추는 철로를 따라 얼굴을 때리는 괘씸한 바람 승강장 의자 옆엔 또 다른 사람이 앉았다 일어나고 지루한 내 얼굴을 흘깃거리는 눈초리가 얄밉다 늦어서야 출발을 알리는 전화벨 소리 나를 마냥 기다리게 만드는 친구의 뻔뻔한 믿음이 약 올리듯 비껴가는 전철을 끈기 있게 세어보게 한다 1999.04.16 2020. 동인지 게재 花雲의 詩/화운의 詩 1 2009.06.24
밤꽃 향기 밤꽃 향기 하얀 꽃술이 뭉게구름을 만들어 주춤거리는 땅거미를 밀어내며 야릇한 향내를 뿜어낼 때 누구를 끌어들이는 몸짓일까 혼자 새우는 여름밤이 싫어서 비가 오려는 초저녁엔 몸부림이 심하다 누구라도 안고 싶은 정념일까 땅 속의 기운 뽑아 올려 하늘 향해 토해놓는 산란(散亂)의 열기 서릿발 세운 품 속에 고이 받아 든 은밀한 전율 뭇 별 반짝이는 우주를 향해 거침없이 쏘아 올리는 사랑의 교향악이다 2009.06.18 花雲의 詩/화운의 詩 1 2009.06.19
그리워한들 그리워한들 사랑하는 이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은 바라보기에도 사무친다 하루의 끄트머리에서 돌아가기 위해 서두르는 발걸음은 그렇게 분주하고 훈훈하건만 내가 웃어주고 이야기를 나누며 만져보고 싶은 이는 곁에 없다 밤늦어 더디 오는 막차를 기다리며 묵직한 짐을 반가이 받아줄 이를 기다려보건만 썰렁한 옆 좌석엔 아무런 흔적도 없고 정감 어린 무게로 잡아주던 따스함만이 빈 손 안에 남아있다 1997.06.16 막차 안에서 花雲의 詩/화운의 詩 1 2009.06.16
잠 잠 정신이 몸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망연(茫然)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턱 깃털 같은 가벼움으로 새하얀 세상의 문을 연다 온종일 짊어지던 근심의 무게를 슬그머니 발밑에 내려놓고 하루 끄트머리 순간에 잊지 못할 모습이 얼마나 아쉬울지…… 수만 가지 기억들이 상처 가장자리에 말라버린 핏자국처럼 얇은 미소 저편으로 사라지고 난 뒤 속눈썹 사이를 맴돌던 그림자는 미련 없이 천상으로 날아간다 1997.06.23 花雲의 詩/화운의 詩 1 2009.06.15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꽃은 향기를 내고 바람은 서늘하게 해준다 구름은 때를 따라 비를 주는데 너는 무엇을 주었는가 괴로운 일을 위로해주었는가 어려운 일을 보살펴주었는가 주기보다 받기를 원하고 기뻐하는 날보다 슬퍼하는 날 더 많았더라 머무르기 원하여도 가는 시간 아무도 모르니 일평생 할 노릇 다 하고도 한 평뿐인 누울 자리 늘 부족하게 살았던 목숨은 그 한 평조차 부끄럽구나 2009.06.12 花雲의 詩/화운의 詩 1 2009.06.12
강변으로 간다 강변으로 간다 노오란 금잔화 꽃숲을 이루는 날이면 은물결 반짝이는 강변으로 가 보자 파아란 물에 흰 구름 안기고 설익은 그리움 풀잎마다 맺혀 있는 언덕 강물 흘러가 다시 안 오면 물새들 어디론가 떠나버릴 텐데 꽃길 걸어가던 너 보이지 않으면 푸른 들은 그 빛을 잃어버린다 아! 눈부신 햇살 풀숲에 기대어 남몰래 부서지는 날이면 물살에 떠내려가는 꿈 조각 주우러 강변으로 가야겠다 2009.06.10 花雲의 詩/화운의 詩 1 2009.06.10
야간열차 야간열차 그대 잠든 머리 위에 소리 없이 떠 있는 별을 밤 깊도록 헤아리고 있을 줄은 모를 겁니다 정막을 헤치고 검은 숲 모퉁이 돌아가면 북두칠성 따라서 돌고 동녘하늘 미소 짓는 샛별이 그대 마음처럼 반짝거립니다 모두가 잠든 밤 행여 고운 님 깨울세라 숨어서만 토해내는 기적소리 살아있는 생명들이 무한한 안식을 누리는 시간 어둠을 통과하는 야간열차는 솟구치는 그리움 누르지 못해 하얀 새벽길을 달려갑니다 1996.05 花雲의 詩/화운의 詩 1 2009.06.09
어떤 이야기/ <상사화> 어떤 이야기 * 이 세상에 그토록 많은 노래가 있는 건 이룰 수 없는 사랑이기 때문 *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리움으로 막을 수 없는 눈물을 위로함이지 이 세상에 그토록 뜨거운 눈물이 있는 건 끝내 잊지 못할 사랑이기 때문 * 은밀하게 빛나는 인연으로 묻어두고서 눈 감을 때까지 아프게 기억함이지 그래서 그렇게 수많은 노래와 눈물이 세상을 덮어도 세월 따라 마음 따라 길고 긴 강물을 만들어 가는 거야 1996.06.03 시집 게재 花雲의 詩/화운의 詩 1 2009.06.09
옹기 항아리/<상사화> 옹기 항아리 깊은 사랑이 하룻밤에 이루어지랴 짓이겨진 인내로 곱게 빚어 꽃불에서 태어난 옹기 항아리 뽀얗게 분바르지 않아도 윤기 나는 아름다움 무엇이나 담아주는 넉넉한 품 안에서 질박한 사랑이 쉬어간다 오래오래 우러나 깊어지는 간장, 된장, 고추장 감칠맛 나게 삭은 젓갈이 할머니 손에서 어머니 정성으로 여인의 삶이 곰삭는다 달그림자 머무는 우물 가 장독 위에 밤이슬 내리면 사무친 기다림 삭고 삭은 정으로 익어간다 2009.06.07 시집 게재 花雲의 詩/화운의 詩 1 2009.06.07
기생이었나보다 기생이었나보다 노래를 부르면 행복하고 춤을 추면 즐거움에 매혹되는 나는 기생이었나 보다 살아 움직이는 그림을 그리고 싶고 애달픈 시를 짓고 싶은 가슴앓이 머리에서 나오는지 가슴에서 나오는지 어디에서 솟아나는지 모를 일이다 스치는 바람결에 시린 마음 떨어지는 꽃잎에 아픈 마음 기다리는 이 없어도 못내 그립고 보내는 이 없어도 사뭇 서러워라 누가 그리는지 모르는 그림 속에서 나비 닮은 내가 살고 이슬 닮은 꿈이 자란다 춤추고 노래하며 꽃길을 가는 나는 아마 기생이었나 보다 2009.06.05 花雲의 詩/화운의 詩 1 2009.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