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雲의 산책로/화운의 에세이 10

나무들의 수난

나무들의 수난 새벽녘에 태풍 '곤파스'가 우리나라를 휩쓸고 지나갔다. 미리 방송에서 예고를 해주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대비는 해두었으나 다소간의 염려를 마음에 담고 잠이 들어서인지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날이 밝기도 전부터 창문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심상치 않더니 점점 드세어지면서 베란다 그 넓은 창이 흔들거리기 시작한다.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잠겨 있지 않은 창문을 살펴보고 있는 대로 다 걸어 잠갔다. 아침이 되어도 하늘은 밝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빗방울까지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점점 빗발이 굵어지고 이윽고 쏟아 붓기 시작한다. 거실에서 창밖을 내다보니 심하게 부는 바람 따라 빗줄기가 옆으로 파도치듯 물결치는 모습이 장관이기도 했지만 무척 겁이 나는 장면이기도 했다. 자연의 제어할 수 없는 힘을 보면..

기다리는 시간

기다리는 시간 버스터미널에 가면 일부러 한 시간쯤 여유 있는 차표를 산다. 임박한 시간 차표를 사게 되면 차가 떠날까 봐 조바심이 나서 서두르게 되기 때문이다. 서두르다 보면 사람들이 오고 가는 모습이나 터미널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가 없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서 그 사연들을 훑어보며 그들의 여정을 상상하며 삶의 다양한 모습을 그려보게 된다. 그 틈에서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으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다시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기에 터미널에서 한가로이 기다리는 시간은 인생의 간이역에서 한소끔 '뜸들이기' 같아 여간 넉넉해지는 것이 아니다.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이 버스 승차장으로 달려가고 어디선가 이제 막 돌아오느라 약간은 피곤한 듯한 표정을 보며 그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궁..

아들 이사하던 날

아들 이사하던 날 며칠 전부터 주섬주섬 짐을 정리하던 아들이 마침내 이사를 하는 날이다. 직장에 출근하는 시간이 많이 걸려 언제 적부터 직장 근처로 이사 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던 아이가 어느 날, 원룸을 계약했다며 이사 나가겠다고 통고를 해 온다. 나이도 나이인지라 이제 혼자 살아갈 때도 지난 것 같아 겉으로는 환영 해주었지만 속마음은 그래도 밖에 혼자 내보내기가 안쓰러워진다. 아침 내내 컴퓨터를 분해하느라 분주하더니 드디어 대충 정리가 된 것 같다고 출발을 하려 한다. 제 차에 싣고도 넘치는 분량은 내 차에 옮겨 놓고 저 먼저 출발할 테니 어디로 오라고 메모에 주소를 적어 준다. 아이가 출발하는 것을 보고 약간의 밑반찬이랑 청소 도구를 챙겨 바로 뒤따라갔다. 서울 외곽순환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분당 수..

부모님은 뭐 하시니?

부모님은 뭐 하시니? 얼마나 많은 자녀들이 부모의 직업에 대해 자부심을 기지고 있을까? 결혼을 하고 자녀를 키우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직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의 성장 과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나로서는 지나고 나서 생각해볼 때 가슴 아픈 부분도 많고 후회되는 일이 적지 않다. 요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초등학교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은데 하루는 한 여자 아이에게 아버지께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물어보게 되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하다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우물우물 거린다. "뭐라고? 잘 안 들려. 다시 얘기 해줄래?" "... ㅇ...물상이요." "뭐라고? 오...물상?" "고...물...상이요." 대답하고 싶지 않은 것을 마지못해 하는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겨..

아기의 아픔

아기의 아픔 지난겨울 남편과 함께 팔짱을 끼고 길을 걷다가 갑자기 남편이 방향을 바꾸는 바람에 어깨가 꺾여 심한 통증을 느끼게 되었다. 그 후 파스를 붙이고 찜질을 하는 동안에 증세가 호전되어 몇 달째 나아지는 듯했는데 최근 들어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팔을 많이 쓰게 되어선지 얼마 전부터 서서히 어깨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 좋아지려니 기다려 봐도 좋아지지 않더니 급기야는 밤에 더욱 심해지는 통증으로 밤을 제대로 잘 수가 없게 되었다. 아무래도 단단히 고장이 난 것 같아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보았더니 뼈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고 MRI를 찍어봐야 자세한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MRI 촬영을 하려면 예약을 해야 한다고 해서 예약 일을 잡기 위해 복도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데 맞은 편 주사실..

신이 주는 것

신이 주는 것 나주에 있는 영화 세트장에 갔을 때 일이다. 영화 세트장을 여러 군데 가 보았지만 나주에 있는 세트장은 다른 곳과는 다르게 훨씬 규모가 크고 짜임새 있게 되어있는 것 같아 볼거리를 많이 제공해 주었다. 세트장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구경을 왔지만 그런 규모에 비해서는 왠지 관람객이 적은 것 같아 보여 아쉬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왜냐하면 그만한 세트장을 구비해놓고 영화를 다 찍고 난 이후 관람을 위한 홍보가 덜되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 때문이다. 때마침 양귀비 축제를 한다고 해서 겸사겸사 보려고 갔었는데 영산강 주변에 있는 양귀비꽃밭은 시기가 맞지 않아서 꽃망울이 맺힐 생각도 안하고 있어 영상테마파크를 돌아보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양귀비 꽃 축제와 맞물려서 영상테마피크는 좋은 구경거리가 될..

손을 보고 알았지

손을 보고 알았지 교회 예배시간 중간에 잠시 쉬는 시간이 있어 물을 먹으러 정수기 있는 곳으로 갔다. 정수기 앞에는 몇 사람이 물을 먹으려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고 두 살 겨우 됨직한 여자 아기가 어머니가 떠주는 받아먹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병아리가 물을 먹는 모습과도 흡사하여 얼마나 귀여운지 모른다. 그 뒤로 여학생 하나가 물병에 물을 담고 있었는데 물을 받고 있는 사이로 커다랗고 두꺼운 손이 갑자기 들어와서 새치기를 한다. 그러자 여학생이 흠칫 놀라는 듯 하더니 이내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물을 다 받고는 고개를 돌려 얼굴에 가득 미소를 짓는다. “손을 보고 아빠인 줄 알았지” “그래. 네 아빠 손은 두꺼비 손이야” 두 부녀가 다정하게 나누는 짧은 대화다. 옆에서 듣고 있자니 얼마나 사랑스러운 ..

부러진 소나무

부러진 소나무 3월도 하순으로 접어들어 봄맞이에 마음까지 부풀었는데 때 아닌 폭설이 왔다. 따스해진 봄기운도 있어 추적추적 비라도 내리려니 했지만 저녁부터 내리던 진눈깨비가 아침에 일어나보니 창문 밖 세상이 온통 하얗다. 때 지난 눈밭을 즐기겠다 싶어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아르바이트 나갈 준비를 한다. 버스를 타고 지나는 풍경도 하얀 세상이다. 하얗다 못해 나무든 집이든 엄청나게 뒤집어쓴 눈의 무게를 감당키 어려워 보인다. 나무 밑동이나 가지나 하얗게 둘러싸여 마치 솜을 몸에 두르고 있는 듯 쌓인 눈의 두께를 짐작하게 하지도 못할 정도다. 태강릉 곁을 지나가다 보니 왕릉을 위엄 있게 지키던 소나무들이 사방 헬 수 없이 쓰러져 있고 심지어는 뿌리까지 뽑혀져 벌러덩 뒤집혀 있다. 지난 밤, 눈 폭탄이 얼마나..

동그라미를 채우자

동그라미를 채우자 한밤중 곤하게 자다가도 꼭 중간에 잠을 깨게 된다. 잠이 든 후, 계속 7, 8시간을 자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3시간가량 자다 보면 화장실엘 가든지, 목이 마르든지 한 두 번은 일어나게 된다. 정말 몸이 피곤하면 얼마 안 있어 다시 잠들게 되지만 다시 자려고 누우면 말똥말똥 공상만 하다가 그만 잠을 놓쳐버리게 된다. 십 여분 정도 잠을 청해 봐도 곧바로 잠이 들지 않으면 아예 일어나서 무언가를 하는 게 차라리 낫다. 자리에 누워서 뭉개봐야 머리만 복잡해지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물 한 모금 마시고 책을 편다. 성경 통독은 일 년에 한 번씩 하는 것이라 읽는 분량에 따라서 읽을 때마다 비어있는 동그라미를 채우는 목록 표가 있다. 그 목록 표에는 하루에 읽어야 할 분량이 정해져 있고 다..

어디쯤에서 내리게 될까

어디쯤에서 내리게 될까 "잠시 후면 조치원, 조치원역에 내리겠습니다." 기차 안내 방송이 내려야 하는 승객을 위해 친절히 안내를 해주고 있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자마자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누워서 지그시 눈을 감고 기차 여행을 즐기고 있는데 기차가 정차하는 역에 다가갈 때마다 방송이 울려 나온다. 나의 목적지는 대전이었으므로 안내 방송이 나오면 한쪽 눈만 슬며시 뜨고 정차 역 플랫폼만 슬쩍 보고 다시 덜컹거리는 바퀴 진동의 여운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대전역에 다가갈수록 그때는 고개까지 돌려 창밖을 내다보게 된다. 얼마 만에 타보는 기차 여행인가? 지인의 결혼식이 있어 예식 시간에 맞춰 예매표를 끊고 아침부터 서둘러 서울역에 나갔다. 지하철을 타고 가서 서울역 대합실로 올라가니 벌써부터 왁자지껄한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