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雲의 詩/화운의 詩 4 99

먹거리 천국

먹거리 천국 방과 후 학생들이 귀가하는 통학버스 안 차창 밖 즐비한 음식점 간판들이 때마침 출출해진 아이들의 식욕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어느 구석에선가 배고프단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김밥, 우동, 떡볶이, 순대, 치킨, 햄버거, 피자, 돈까스, 삼겹살, 자장면, 스파게티, 칼국수, 스테이크…… 시장기가 발동한 아이들의 군침 도는 외침은 불러도 불러도 끝날 줄을 모르는데 언제든지 문 밖을 나서면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만날 수 있는 먹거리 천국 실컷 배부르게 먹고도 멈추지 못하는 식탐이 지탱하지 못하는 몸무게로 헐떡거린다 맛과 질을 따져가며 먹다가도 입에 맞지 않으면 아까운 줄 모르고 서슴없이 버리는데 북한에선 허기져도 먹을 게 없어 풀뿌리로 연명하다가 말라 죽어가는 목숨들이 허다한 지옥의 왕국 무엇이든..

꽃비

꽃비 봄이 온 것을 누구보다 먼저 알고 흐드러진 잔치 벌여놓고는 간드러진 춤사위 끝나기도 전에 서둘러 등을 돌리는 것은 무슨 연유이기에 어디든지 자유롭게 날아갈 것처럼 바람에 업혀서 수선스럽게도 달려간다 가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얼음 풀린 섬진강 기지개 켜면 해득거리는 꽃 이파리 강물에 쏟아놓고 그렇게 눈부신 날갯짓으로 호젓한 길모퉁이 찾아 몰려가기 바쁘다 아무도 살뜰히 기억해주지 않아도 다녀간 흔적 잊지는 말라고 서로 엉켜 살아가는 동안 생긴 상처 흉터 언저리에 남겨진 향기로 보듬어 돌아오는 계절에 더욱 사랑하라고 마음 문 닫지 못하는 가슴에 저리도 부산스럽게 와글대며 날아든다 햇살 간질이는 손길이 신이 난 봄날 오후에…… 2011.04.10 섬진강 가에서

귀향(歸鄕)/<물도 자란다>

귀향(歸鄕) 얼어 죽을지도 모를 눈밭을 건너 돌아가는 길이 수만리 길이어도 새순으로 돋아난 그날 이후 목숨 다해 피워낸 꽃이 수만 송이 횃불처럼 밝혀주던 꽃의 행렬이 산천에 만발하여 충만했기에 등 떠미는 손길이 미워 떠날 때는 그리도 서러웠지만 애처로이 떨어진 꽃자리 찾아 기어이 다시 찾아가는 봄, 봄, 봄 2011.04.05 시집 게재

낚시터에서

낚시터에서 얼었던 강물 풀리고 봄볕 내려앉는 강가에 낚싯대 걸쳐놓고 앉은 저 강태공 건져 올린 물고기 한 마리 없이 지루한 한나절이 흐르는데 하릴없는 햇살만 빈 바구니 안에서 맴돌고 떠오르지 않는 낚싯줄이 한가롭기만 하다 잔잔한 바람결에 파문이 일면 상념 번지듯 퍼져가는 동그라미 반짝거리는 물결 더듬어 떠난 길에서 영영 돌아올 줄 모르고 무아지경의 시간이 쌓여갈수록 무상으로 녹아내리는 공허한 순간에 욕망마저 다 놓아버린 빈손으로 은빛 강물에서 무엇을 낚으려 하는가 2011.03.29.

꽃잎 서신

꽃잎 서신 꽃샘바람 불기도 전 겨울이 물러갈 때쯤이면 말해주지 않아도 먼저 압니다 참을 수 없는 한기를 견뎌내고 그토록 기다리던 소식 전하려 진눈깨비 맞으며 일어나는 꽃눈 죽은듯한 가지에 생기를 올려 오래 공들여 품어온 봉오리 속에 아낌없이 내어줄 향기 간직했다가 누구라도 그 품에 안기기 원한다면 눈부신 햇살에 떨리는 몸 추슬러 천상의 환희로 펼쳐 드리렵니다 2011.03.23

시계

시계 째깍 째깍 음산하고도 숨 막히게 쉬지 않고 돌아가는 두 개의 바늘 등짐도 없는데 서두르는 법 없이 일정하지만 힘겹게 걷는다 째깍 째깍 되돌아가는 것은 허락 지 않아 다가올 순간을 응시한 채 앞으로만 발걸음을 떼는 시계바늘 한 바퀴 돌아오면 다시 그 자리 빛나던 순간들 영원히 묶어두고 싶지만 일체의 오차도 없는 오만한 걸음 속에 돌아보고 싶지 않은 기억들도 아프게 숨어 있다 2011.03.27

이길 수 없는 전쟁

이길 수 없는 전쟁 이념이 서로 다르다고 살상의 무기를 들이대고 공격하는 것만이 전쟁이 아니다 살아남기 위하여 먼저 잡아먹어야 하는 자손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 목숨을 거는 출세의 고지를 남보다 빨리 점령하려는 결승점을 향하여 죽어라 운동장을 달려가는 자존심을 굽히지 않으려고 끝내 버티고 있는 재판에 이기려고 온갖 모략으로 상대를 공략하는 공정하게 타협할 수 없어 이리저리 찢겨도 싸워야 하는 이기고 지키려는 경쟁과 다툼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우리 사는 세상과 화합하지 못해 겪어야 하는 끔찍한 투쟁 위대한 자연과의 전쟁에서 누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지극히 섬세하고 온전한 섭리를 거슬려 당하게 되는 대재앙 그 무서운 저항을 피할 수 없음을 아예 잊어버리고 살았는가 2011.03.12 일본에서 일어..

진눈깨비

진눈깨비 지난겨울 빛이 그대로 남아있어 가지 끝에 배인 눈꽃 냄새 아직 다 지워지지 않았는데 웅크린 대지를 흔드는 진눈깨비 산골짜기 잔설을 녹이려는지 종일토록 내리고 있다 기나긴 잠에서 어서 일어나라고 겨우내 껴입었던 겉옷을 벗어내라고 부드러운 숨결로 사랑할 때가 되었다고 밤 깊도록 멈추지 못하는데 얼굴 시퍼렇게 어려 있는 수심은 떠나지 않으려는 등덜미 밀어내기 못내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일까 2011.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