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雲의 詩/화운의 詩 4 99

눈감고 보는 빛

눈감고 보는 빛 달리는 차 안에서 눈을 감고 있으면 건물 사이로 나무 사이로 그림자를 헤쳐 가는 햇살이 보인다 그들의 농담이 각기 달라서 활활 타는 용광로의 불덩이였다가 창호지 문살에 비치는 달빛이었다가 밤길 비춰주는 손전등으로 다가온다 눈을 감고 있어도 보이는 빛 누가 보내주는 신호인지 몰라도 은근히 또는 번개처럼 번득이는 소리로 닫혀진 생각자리 두드릴 때 맑은 종소리 울려 나오듯 보일 듯 말듯 시상詩想을 몰아 이윽고 지친 눈을 뜨게 해준다 2011.10.31

낙엽 진다해도

낙엽 진다해도 한창 푸르를 때는 아무도 모른다 누가 최고로 치장을 하게 될지 노랑, 빨강, 주황 저마다 고운 빛으로 가로수 길에서 산마루까지 눈길 가는 곳마다 현란해지는데 한여름 무성할 때는 아무도 모른다 누가 먼저 땅으로 떨어지게 될지 누구보다 앞서 은행잎 어지럽게 휘날려갈 때 단풍나무 몸단장에 여념이 없으니 아무렴 어떠랴 그래 봐야 한겨울이면 너도나도 홀랑 벗은 알몸이 될 걸 온 세상 순결한 옷 갈아입을 때 가지마다 새하얀 눈꽃 피우게 될 걸 2011.10.26

오징어

오징어 물속에 사는 대부분의 생물들은 지느러미로 헤엄을 치거나 여러 개의 다리로 걸어 다니거나 이도 저도 없는 맨 몸통이면 물속에서 유영을 하거나 바닥을 기어 다닌다 한두 가지 기능만으로도 능숙하게 잘 살아가는데 머리 좋고 민첩하고 위장술에 능한 오징어 세모난 머리로는 지느러미인 양 헤엄치고 잘 볼 수 있는 눈과 강철 같은 이빨 열 개의 길고 짧은 다리는 무적함대와 다름없다 그뿐이랴 변장에도 능해 상대를 위협할 때는 몸빛깔을 현란하게 바꾸어 겁을 주기도 하고 위기에 언제라도 발사할 수 있는 먹물 포탄에 그 다재다능은 누구에게 비할 수 없을 정도다 오징어 중엔 뇌가 커서 아주 영리한 갑오징어도 있다 그 놈들은 암컷보다 수컷이 네 배나 많아 큰놈들에게 밀린 작은 수컷들이 암컷으로 변장해 수컷의 환심을 사는 ..

적선(積善)

적선(積善) 감기기운이 있어 근무 중 휴식시간에 잠시 누워 쉬고 있는데 애~ 애앵~ 귓가에서 때 아닌 모기 소리 얼른 손사래를 쳐 쫓아버렸으나 눈 깜짝할 사이 눈가에 한방 맞았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무장이라도 하듯 얼굴엔 마스크까지 썼는데 그 틈새로 어이없이 흡혈 당하고 만 것이다 그래, 놈들도 한겨울 닥치기 전에 종족을 남기려니 피 한 방울 필요했겠지 동정할 여지도 없는 모기를 위해 헌혈을 하게 된 쌀랑한 가을 오후 2011.10.13

상실(喪失)

상실(喪失) 버스 안에서 책을 읽다가 목적지에 정차한다는 방송을 미처 듣지 못했다 아차! 싶어 서두르다가 교통카드를 찍지 못하고 그냥 내려버렸다 다음 지하철로 환승을 하려고 하니 이런, 1600원이 홀라당 빠져나가는 게 아닌가 갑자가 치밀어 오르는 울화통 부지불식간에 당한 손해가 도대체 너그럽게 받아들여지질 않는다 바보! 멍청이! …… …… 기습을 당하듯 입은 손실을 무슨 수로 만회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우선은 평정심을 찾는 게 가장 이로울 듯싶다 2011.10.13

알밤

알밤 소담했던 밤송이 다 떨어지고 빈 껍질도 보이지 않는 나무 아래 올망졸망, 여남은 살배기들이 대여섯 몰려있다 고개를 숙여 땅바닥을 훑어보며 떨어진 밤송이를 헤집어 열심히 살피고 있다 그러던 중 한 녀석이 알밤이라도 찾았는지 누가 채가기라도 할까 봐 얼른 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는다 “어디, 몇 개나 찾았는지 한 번 보자!” 내밀어 보이는 작은 손 안에 도토리만한 산밤 몇 알 암갈색 유리구슬과도 같다 “아이고, 예뻐라! 꼭 느그들처럼 생겼다!” 나뭇가지 사이로 갈바람 스치자 우수수 밤나무 이파리들 쏟아져 내린다 2011.10.11

냄새

냄새 은행나무 가로수 아래 여기저기 떨어진 은행알 금 방울인양 주워 봉지에 담았더니 코를 찌르는 구린내 버릴까 하다가 아깝기도 하여 비닐봉지 꽁꽁 묶어 데리고 왔다 온 집안 진동하는 악취에 코를 막아야 했지만 깨끗이 씻어 햇볕에 말리니 희고 매끄러운 옥구슬이 되었다 어쩜, 몰라보게 예뻐졌네! 대굴대굴 구르는 뽀얀 얼굴마다 분 냄새가 났다 2011.10.11

생존법칙

생존법칙 가을이기엔 때 이른 늦여름 녹음이 사위어 들기도 전인데 뚝, 뚝 떨어지는 어린 열매들 아직 여물지도 못한 채 무더기로 떨어져간다 도토리 살 속에 알을 놓는 벌레 보일 듯 말 듯 작은 몸으로 싱싱하고 푸른 곳간에 구멍을 뚫어 깨알보다 작은 분신 하나 슬어놓고 그 가지 끊어 땅에 떨어뜨린다 한쪽에선 사정없이 잘려 나가고 한쪽에선 얼마나 살아남을지도 모르면서 끈기 있는 수고로 한 생을 바치는데 또 다른 생명 살리기 위해 힘써 길러낸 목숨 값없이 얻어가고 따지지 않고 내주면서 알게 모르게 순종하는 미덕을 숭고한 자연의 법칙이라 정의하고 있다 2011.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