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3912

하얀 세상

하얀 세상 연둣빛 반짝이는 봄이다가 청록빛으로 우거지는 여름 황금빛 물드는 가을 지나면 함박눈 쏟아지는 겨울이 온다 시간이 흐르면 계절도 익숙해지고 색깔도 단순해지나 보다 어릴 때는 한없이 여리다가 하늘을 찌를 듯 무성해지고 나이 들어 볼품없어지는 한살이 모든 걸 내려놓을 때가 되면 보란 듯이 드러낼 것도 없고 알아 달라 자랑할 것도 없이 스스로 낮춰야 할 때가 오거늘 다 없어지고 나면 눈부시게 남는 게 하얀 색이란 걸 여태 모르고 있었다 2021.12.20

천국연습

천국연습 멋진 풍경을 보면 보고 싶은 사람이 그립고 어려울 때 도움을 받으면 세상을 믿을 수 있게 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난다 살아있을 때 일찍이 겪어보아야 하고 미리 느껴보아야만 하는 건 다음 세상에 가서도 행해야 할 것을 잘 배워두기 위한 것 다음 세상은 감사하고 존경하고 사랑해야만 하는 천국이기에 선민이 되기 전에 행해야 할 것 끝없는 감동연습뿐이다 2021.12.24.

빈털터리 사랑/<상사화>

빈털터리 사랑 사랑을 하게 되면 깊은 마음 나누고 따스한 체온 나누고 가락지에 정을 새기는데 사랑이 어긋나게 되면 마음은 지옥 같고 만날 수도 없이 절망 속으로 침몰한다 사랑은 어디로 갔을까? 싫어서도 아니고 바랄 수도 없어서 잊고 돌아서야 한다면 남아있는 건 무엇일까? 사랑을 할 땐 세상 다 얻은 듯하지만 끝까지 지키지 못하면 비어있는 가슴에 버려야 할 것만 쌓인다 2021.12.08. * 시집 게재

낙엽이 되다

낙엽이 되다 살그머니 부는 바람에도 위태로운 잎새 한 때 그의 세상은 하늘 아래 끝없는 상전벽해(桑田碧海) 초록을 덮을 세력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듯 보였다 뜨겁게 사랑하고 치열하게 살아온 여정이라서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순간은 알록달록 찬란해서 눈물겨운데 놓아야 할 때가 온다 한들 그리 아쉬울 게 무어랴? 다시 돌이킬 수 없다 한들 그리 서러울 게 무어랴? 서서이 밀려오는 이별 소식에 덧없는 욕심은 버리기로 한다 홀가분해지기 위해서 남김없이 마른 잎이 되기로 했다 다가오는 새날을 위해서 아끼지 않고 떨어지기로 했다 2021.11.05. 주어진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았듯이 다가오는 새날도 진지하게 맞고 싶습니다.

겨울 자장가 ★

겨울 자장가 뜰아래 스치는 바람이 차다 가랑잎은 어디론가 날려가고 마른 잎들은 순순히 흙 위에 눕는다 이제는 멈추고 놓아야 할 때 조바심 내려놓고 눈을 감아도 좋으니 차가운 벌판 맴돌지 말고 따스한 품으로 찾아가거라 허공을 휘젓는 바람 잠잠해지면 살얼음 깔리는 호수도 고요해지니 방향 없이 헤매지 말고 조용한 곳에 깃들어 편히 쉬거라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하늘 떠나가던 철새들도 멈추었으니 온 세상을 덮는 함박눈 아래 포근한 꿈속으로 들어가 보려무나 곤고하고 외로웠던 마음 끌어안고 스스로 위로하며 눈물자국 지울 때 곤히 잠들어 깨지도 말거라 찬란한 봄날이 돌아올 때까지... 2021.11.27 길었던 기다림의 마지막 겨울 충만한 쉼을 통해서 희망의 봄 맞으시기를... * 174회 * 2022.02. 우리..

찬란한 이별 ★

찬란한 이별 앙상하게 남은 나뭇가지를 보며 물어봅니다 세월이 어찌 그리 재빠르냐고 인생이 어찌 이리 허무하냐고 바람에 쓰러지는 빛바랜 억새꽃이 말합니다 푸르른 시절이 없었더라면 찬란한 계절은 오지 않았을 것이고 서러운 시련이 없었더라면 진정한 기쁨도 얻지 못했을 거라고... 의연히 떠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최고로 멋진 삶이려니 그렇게 세상은 존재하고 지속되고 있다고... 누구의 강요도 아니고 누구의 횡포도 아니었으니 그것이야말로 누릴 수 있는 자의 특권이기에 묻지 않아서 모르는 게 아니고 듣지 못해서 모르는 게 아니었습니다 2021.11.25. 우리가 누구의 강요도 없이 모였듯이 나아가는 길은 찬란할 것을 믿습니다. * 2022.02 우리시 게재 * 171회

은행잎 연가 ★

은행잎 연가 어릴 때는 조그만 연둣빛 손바닥이었다 그 작은 손 활짝 펼쳐서 간지러운 햇살도 잡아보고 부드러운 바람도 어루만지며 이 세상 고마운 길동무들에게 손이 닳도록 인사를 보냈었다 오는 사람 가는 사람 숱한 인연 만나고 떠나보내며 노랗게 물들어갔던 정 금빛날개로 날아갈 때가 되었나 보다 화려하진 않았어도 한결같은 일념으로 설레어 온 길 떠날 때가 되어서야 눈부시게 휘날리고 있지만 지키고 싶은 것까지 미련 없이 내려놓아야 하는 이별의 길목에서 꼭 전하고 싶은 말 아픈 만큼 사랑했다 2021.11.15. * 별님을 향한 詩 164회

그대로 두어라!

그대로 두어라! 산등성이 울긋불긋 날마다 다른 그림 보여주는데 반갑지 않은 북풍 불어와 가랑잎 눈발처럼 날린다 마당 안에 가득 쌓인 단풍잎 더 높은 비행을 시도했으나 날아간 곳은 그리 멀지 않은 곳 바람 고요한 마당 한편 나무 밑이다 보기엔 쓰레기 같아서 쓸어버려야 할 것 같지만 그대로 두어라! 나뭇잎 한 장의 안식처 아닌가? 어린 잎 힘겹게 피어나서 한 그루 나무 위해 바쳐온 땀방울 돌아갈 때가 되어서야 그들의 헌신으로 산천마다 눈부시다 누군가의 밑거름이 되고 보이지 않는 미물들의 처소가 되어줄 마지막 여정 방해하지 말고 떨어지는 잎 그대로 두어라! 2021.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