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雲의 詩/화운의 詩 5 100

몸값

몸값 시들시들 말라서 구석으로 밀려난 땡 처리 상품 유통기한 넘겼다고 진열장에서 쫓겨나 외면당한 채 알뜰한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나저제나 새 주인을 기다려 보지만 눈길조차 받지 못하는 서러운 몸 집었다 다시 놓는 푸대접에 가슴 졸이며 그대로 잊혀질 것을 염려하는 동안 그 옆에 생선 몇 마리 그을린 밀짚모자 아래 흐르던 땀 방을 소금기 절은 뱃전을 때리던 거친 파도 다 기억할 수 없는 고달픔까지 서서히 증발하며 제값을 잃어가고 있다 2012.09.28

태몽/ 1

태몽 1980년 8월 14일 만삭이 된 첫아이 분만예정일은 7월 24일인데 예정일을 앞두고 산통(産痛)을 기다리며 찌는 더위에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오질 않으니 하루하루 지나는 날이 초조하기만하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의료진들은 알몸의 배불뚝이를 수술대 위에 올려놓았다 겁에 질린 채 정신은 혼미해졌고 얼마가 지났는지 깊은 잠에서 미처 깨어나기도 전 꿈결인 듯 아득하게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차츰 정신이 들면서 지독한 통증과 함께 임신했을 때쯤 꾸었던 기이한 태몽이 떠올랐다 고향집 안마당 감나무에 주렁주렁 붉은 감이 익어가는 가을날 그 중 유난히 크고 탐스러운 감이 있기에 할머니와 긴 장대를 흔들어 그 놈을 땄다 너른 도마 위에 올려놓고 자르려 하니 칼을 대자마자 감은..

오백원의 축복

오백 원의 축복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오백 원짜리 하나 팔러 나왔습니다.” 도시의 어둠 속을 달리는 지하철 안 휠체어를 탄 할머니가 껌 한 상자를 무릎 위에 놓고 연신 죄송하다며 사주기를 간청한다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객차 안에서 아무 소득 없이 다음 칸으로 이동하려는 그때 문이 닫히기 전 급히 들어온 한 젊은 남자 깊이 눌러 쓴 검은 모자, 낡은 추리닝 차림으로 선뜻 오백 원을 내밀고 껌 하나를 집는다 그러자 일제히 한 곳으로 쏠리는 사람들의 시선 껌을 집어가는 팔뚝 위에 그려진 문신을 응시하고 있다 거기에 은근한 자태로 서 있는 관음보살상 손끝을 향해 고요한 미소를 보내고 있는데 할머니에게 베푼 선행으로 하여금 눈치만 보고 있던 사람들의 무정한 가슴에 소리 없이 훈훈한 온정의 바람을 불어주고..

덩굴

덩굴 혼자서는 오를 수 없어 누구라도 붙잡아야 했어요 타고 올라갈 기둥이 없으면 땅바닥에 나동그라져 기어야 하기에 사방팔방 한껏 팔을 뻗어보았지요 어쩌다 내 손에 감겨온 당신 죽을 때까지 껴안고 가야겠어요 당신이 돌면 나도 따라서 돌고 밑에서 받쳐주면 위로 올라가고 그렇게 어우렁더우렁 안고 뒹굴어요 갈바람 스치면 끝나는 세상 꽃 피우고 열매 맺어 마른 가지로 삭아버리고 나면 저 푸른 하늘만 더 높아지겠지요 2012.08.10

맛있는 동행/ 1

맛있는 동행 -33주년 결혼기념일에 1971년 10월 스산한 바람이 명동거리를 휩쓸고 지나던 날 쓰디쓴 커피를 시켜놓고 다 식어가도록 부끄러워 얼굴도 마주 보지 못했던 우리 서울과 부산을 오르내리며 여덟 번의 봄 동산을 넘어서 면사포를 썼을 땐 무지갯빛 낙원으로 들어가는 줄만 알았어요 남남이 만나 평생을 반려자로 살아가는 일은 웃음과 눈물로 비벼내는 비빔밥 갖가지 오색나물에 황백지단 올려 참기름 살짝 뿌려주면 고소한 냄새 진동하건만 톡 쏘는 고추장 빠지면 제 맛이 아니지요 따끈한 뚝배기에 골고루 비벼야 참 맛이 나는 걸 자식 낳아 기르느라 입술 말라 부르트고 두어줄 주름훈장 목에 걸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어요 한두 가지로는 삶의 진한 맛을 제대로 내지 못해 맵고, 짜고, 시고, 달고, 쓰기도 했지만 기대..

공항에서

공항에서 지축을 흔들며 달리다가 사뿐히 날아오르는 비행기를 보며 먼 나라로 떠나는 상상을 한다 뜨거운 열사의 나라로 가볼까 야자수 밑에 앉아서 에머럴드 바다를 바라봐야지 해가 질 때면 붉은 바다가 이글거릴 거야 아니면 만년설에 덮여있는 빙산을 오를까 살을 에는 혹한의 계곡에서 끈질긴 인내심을 시험하게 될 거야 아! 지구는 가도 가도 끝이 없구나 저 비행기로 아무리 날아가도 그 머나먼 땅 끝은 끝내 볼 수 없으니 둥근 지구의를 돌리며 가고 싶은 곳에 점을 콕 찍어 허공으로 가볍게 부양하는 비행기에 자유로운 여정을 실어 날아간다 2012.08.17

눈물을 참을 때

눈물을 참을 때 마음 한구석 찢어지는 순간 미처 상처자락 여미지 못해 그만 들켜버리고 말 때 기쁘거나 슬프거나 속으로만 담아둘 수 없기에 그만 참으라는 말은 하지마 넘치는 눈물을 가둬버리면 속속들이 젖다 못해 온몸 다 잠겨버릴지도 모르는데 왜 우느냐고 묻지마 심장이 터질 것 같아도 삶의 골짜기에서 감춰야만 하는 가슴으로 닦아야 하는 눈물도 있어 2012.08.21

글 사냥

글 사냥 한 마리의 포획물을 찾아 산으로 들로 헤매는 사냥꾼처럼 어제는 허탕이었어도 오늘은 글 한 자락 잡을 수 있을까 빈 마음 들고 길을 나선다 이 골짜기 저 골짜기 헤매어봐도 반지라운 깃털 하나 보이지 않고 풀잎을 흔드는 바람만이 가슴 훑는데 어스름 번져가는 땅거미 사이로 유성처럼 떨어지는 섬광 한 줄기 두 팔 벌려 품 안에 그 빛 담을 수 있다면 구름 따라 밤하늘로 흘러간다 한들 별빛 속에 흔적 없이 스러진다 한들 詩 따라 나선 길이 무에 그리 아득하랴 2012.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