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동행
-33주년 결혼기념일에
1971년 10월
스산한 바람이 명동거리를 휩쓸고 지나던 날
쓰디쓴 커피를 시켜놓고 다 식어가도록
부끄러워 얼굴도 마주 보지 못했던 우리
서울과 부산을 오르내리며
여덟 번의 봄 동산을 넘어서 면사포를 썼을 땐
무지갯빛 낙원으로 들어가는 줄만 알았어요
남남이 만나 평생을 반려자로 살아가는 일은
웃음과 눈물로 비벼내는 비빔밥
갖가지 오색나물에 황백지단 올려
참기름 살짝 뿌려주면 고소한 냄새 진동하건만
톡 쏘는 고추장 빠지면 제 맛이 아니지요
따끈한 뚝배기에 골고루 비벼야 참 맛이 나는 걸
자식 낳아 기르느라 입술 말라 부르트고
두어줄 주름훈장 목에 걸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어요
한두 가지로는 삶의 진한 맛을 제대로 내지 못해
맵고, 짜고, 시고, 달고, 쓰기도 했지만
기대어 살아온 세월만큼 길들여진 각별한 맛
더 나이 들어 입맛 희미해지기 전에
양푼 한 가득 푸짐하게 버무려서
사는 동안 매일매일 맛있는 동행이 되자구요
2012.09.05
시집 <엄마는 어땠어요?>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