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歸家) 귀가(歸家) 퇴근길 버스 안 맨 앞자리에 앉아 머리를 떨군 채 미친 듯이 졸고 있는 한 남자 버스가 정차하면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금 아래로 사정 없이 추락한다 푹 주저앉은 어깨 위에 그가 바라지도 않은 짐까지 얹혀져 죽을 때까지 지고 가라 하는지 하루의 무게를 버틸 힘 다 써버리고 앉은 자리가 무너지도록 자꾸만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2012.06.27 花雲의 詩/화운의 詩 5 2012.06.28
바람 부는 숲속에/<물도 자란다> 바람 부는 숲속에 숲 속을 흔드는 바람 서늘하기도 하여 시집 한 권 펴 들고 그늘아래 앉았다 소란스레 비벼대는 나뭇잎 소리에 귀 열고 마음 열어 같이 흔들리는데 풀잎 사이로 기어오는 송충이 한 마리 요란스레 불러대는 숲의 부름 들었는지 책갈피 한 장 넘기기도 전에 저에게도 한자리 내놓으라 다가온다 2012.06.26 시집 게재 花雲의 詩/화운의 詩 5 2012.06.27
내버려 두어라 내버려 두어라 갖가지 채소가 소담한 텃밭 상추, 쑥갓, 부추, 호박…… 매번 뜯어먹어도 쑥쑥 올라오는 새순들이 아침마다 푸짐하다 바로 옆 빈 터에 막무가내 피어난 개망초 먹지도 못하는데 당장 뽑아버릴까 아니 내버려두어라 그도 한철일 테니...... 2012.06.20 花雲의 詩/화운의 詩 5 2012.06.25
새들의 춤사위 새들의 춤사위 아침부터 먹이 찾아 폴짝거리는 참새는 경쾌한 폴카를 가느다란 다리 곧추세워 무대를 누비는 홍학은 격조 있는 발레를 구애의 날갯짓으로 춤바람을 일으키는 타조는 우아한 왈츠를 푸른 창공 맴돌며 하늘자락 휘어 감는 솔개는 한스런 살풀이를 저무는 하늘 길에 황금비단 깔아놓는 가창오리는 절제된 군무를 오색찬란한 망토를 끌며 거드름 피우는 공작은 엄숙한 행진을 2012.06.21 花雲의 詩/화운의 詩 5 2012.06.22
붉은 유월 붉은 유월 담장을 타고 넘는 덩굴장미 간드러진 웃음 5미터 풀섶에 숨어 몰래 익어가는 산딸기의 부끄러움 50알 양귀비꽃밭에 날아드는 나비들의 숨 가쁜 날갯짓 500그램 접시꽃 벙글어 넘치게 담아 봐도 목마른 저녁노을 5,000평 굴렁쇠 굴러가듯 태양을 향해 돌진하는 뜨거운 여름 50,000기압 2012.06.16 花雲의 詩/화운의 詩 5 2012.06.21
꽃양귀비/<물도 자란다> 꽃양귀비 꽃망울이 맺힐 때만해도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햇빛 눈부셔 목마른 유월 겉잎사귀 타 들어가는 한낮인데도 나비들의 숨 가쁜 날갯짓에 이끌려 부풀어가는 풋사랑 고개를 쳐든다 솜털 보송한 목덜미에 더운 입김 감겨오자 그만 보드라운 속곳 들치며 금세 야들야들해지는 꽃송이 벌 나비떼 품안으로 파고들어 흐드러진 춤추자고 간청하니 어쩜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얇은 갑사치마 한 겹씩 벗어내고 있다 2012.06.18 시집 게재 花雲의 詩/화운의 詩 5 2012.06.20
별들이 부서지는 밤 별들이 부서지는 밤 좁은 철창 안에 몸을 구겨 넣은 채 떠나버린 식구들을 생각합니다 낯선 사람이 와서 먹을 것을 넣어주어도 잃어버린 입맛은 되찾을 길이 없고 안락한 집에서 화목한 가족으로 살았던 때가 불과 얼마 전, 외진 공원 한구석 나무기둥에 묶여 아무리 기다려도 데리러 오지 않는 주인을 야속한 마음 억누르느라 짖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렇게 거리에 버려지고 말았습니다 누군가 드나드는 인기척에 놀라 행여 익숙한 체취 맡으려 코를 벌름거려보지만 빼곡히 쌓여진 철창 사이로 들려오는 건 그리움에 꿈틀거리는 버림받은 신음소리뿐 재롱부리고 사랑 받던 호사는 꿈같은 날이 되었습니다 밤이 되면 더위를 잡아먹은 한기가 목구멍으로 차올라 울음까지 말려버리고 한껏 올려다보는 하늘에 떠 있는 총총한 별들 환한 웃음으로 내려다.. 花雲의 詩/화운의 詩 5 2012.06.18
지팡이의 사랑법 지팡이의 사랑법 당신의 두 다리가 건재할 때에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나이 들어 기운 빠져 휘청거리게 되었을 때 그제야 당신은 내게 눈길을 주기 시작했지요 가파른 산을 오를 때나 한쪽 다리를 쓸 수 없을 때 그럴 때나 마지못해 찾곤 하더니 이제 두 다리로 버티기도 힘에 부쳐서 체면불구하고 손을 내미셨나요 예전엔 곁에 있는 것도 귀찮아했지만 아쉬우면 밉상도 찾게 되는 법 이 세상 끝날 까지 어디를 가던지 당신이 앞을 볼 수 없게 되더라도 미리 앞서가지 않고 바로 곁에서 안전한 버팀목이 되어드리겠으니 가늘고 볼품없는 다리라고 무정하게 푸대접하지 마시고 지친 몸과 마음 기꺼이 맡겨주세요 2012.06.12 花雲의 詩/화운의 詩 5 2012.06.13
思春 思春 꽃가지에 붙어있는 연둣빛 나비애벌레 하늘거리는 꽃향기에 가던 길을 멈추었다 몇 겹의 껍질을 벗어야 황홀한 꿀맛을 볼 수 있을지 달착지근한 꿀내에 벌써부터 작고 여린 뿔을 세운다 2012.06.04 花雲의 詩/화운의 詩 5 2012.06.04
기적의 손 기적의 손 엄마 품에 안겨 밖으로 내민 아기의 손 아주 작고 어린 손이 무얼 잡으려는지 연신 꼼지락거리고 있다 이 세상에 올 때는 빈 손으로 왔지만 점점 자라면서 그 손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잡을 것인가 손가락에 힘이 없을 때는 쥐어주는 것도 종종 놓쳐버리지만 힘이 생기면 가진 것도 모자라 남의 것도 거침없이 낚아챌 것이다 넉넉히 쥐고도 넘쳐서 은행에, 증권에, 부동산에 묻어둘 텐데 언젠가는 다 놓아야 할 불안한 것들 손에 가득 찰 때마다 베풀고 나누어 손이 비워질 때마다 또 다시 채운다면 저 작은 손으로 얼마나 많은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까 2012.05.03 花雲의 詩/화운의 詩 5 2012.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