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雲의 詩/화운의 詩 5 100

꽃 그늘 아래서/ 1

꽃그늘 아래서 향기로운 꽃도 잠시뿐이구나! 봉오리 피워보려 애쓰던 날이 지루하기만 하더니 이른 비 맞고 활짝 피었어도 며칠이면 꽃잎 떨구고 말 걸 긴긴 날 손꼽으며 꿈을 키우던 날도 잠시뿐이구나! 봄이 오면 고운 님 만나고 싶어 눈만 뜨면 밖으로 향하더니 다시 찾아온 환락의 날 기울어가는 햇볕도 아까워 꽃잎 흔들어 기뻐했으나 바람에 떨어져 뒹굴어가는 순간 곱디고운 날도 잠시뿐이구나! 012.04.12 시집 게재 * 수정부분 있음

레모네이드 사랑/<상사화>

레모네이드 사랑 풋풋한 시절 우리는 가난했던 연인들 햇살 따끔거리는 골목 안 찻집에서 레모네이드 한잔 주문하고 마주 앉았지 얼음 가득 채워진 유리잔에 두 개의 빨대를 꽂고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이 달콤하기만 했던 날 새콤달콤한 음료를 홀짝거리며 감미로운 석양이 기울도록 단꿈을 꾸었지만 누군가를 만나서 한마음이 되려는 길은 속속들이 녹아져야 한다는 걸 미처 몰랐네 하나의 컵 안에서 두 생각이 충돌하는 동안 신맛이냐 단맛이냐 으르렁거리다 보면 꿈같은 행복은 물 탄 듯 묽어져버리고 그 상큼했던 만남이 점점 떫어지는 걸 모르고 있었지 투명한 유리잔 밑바닥이 보이기 전 사이다 같은 미소를 자꾸만 섞어야 했던 건 사랑의 청량제가 되고 싶었던 갈망 쩔쩔매던 어설픔이 레몬즙순정이었음을 짜릿한 거품이 다 빠져버린 후에야 ..

카푸치노

카푸치노 아프리카 거친 들판 불타는 태양 아래 알알이 땀방울로 맺힌 마법의 열매 기나긴 시간 흘러와 찻잔 속에 검은 마술 풀어놓을 때 계피 향에 흙먼지 일어나는 고향이 어리고 부드럽게 퍼지는 우유거품 위로 뜨거운 남국의 구름이 떠돈다 가까이 할수록 헤어 나올 수 없는 향기 허한 가슴으로 눅눅해지는 날이면 혀끝으로 세상을 유혹하는 묘약에 빠지고 싶다 2012.03.28

술 맛

술 맛 짠 소금을 태우면 단맛이 남고 쓴 약초도 달이다 보면 단맛이 든다 단것도 오래 두면 신맛이 나고 신 것을 오래 두면 식초가 되나 맛이 가고자 하는 종착역은 술이 되는 것 묵으면 묵을수록 맛과 향은 깊어져 좋은 거나 싫은 거나 두고두고 묵혀두면 술처럼 익을 테니 잘났거나 못났거나 서로서로 깃들어 곰삭아서 향기롭게 익어가 흥겨웁게 살고지고 2012.04.17

섬마을 새벽종

섬마을 새벽종 서해바다 외딴 섬마을에 작은 교회 하나 있었다 가파르게 올라가는 언덕 위에 줄을 당겨 울리는 종탑이 있었는데 수평선 너머로 별빛 흐려지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종이 울렸다 가난하고 고단한 자의 기도 들으시라 두꺼운 미명을 열고 날마다 울었다 떨리는 쇠 울음이 채 사그라지기 전에 깊은 바다로 줄지어 향하는 고깃배들 오늘도 험한 풍랑 이기고 만선으로 돌아오길 빌고 또 빌었어도 끝내 섬을 떠나고 싶은 젊은 여자 마침내 애끓는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어느 날, 종탑을 떠난 종소리처럼 섬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2012.04.03

활어시장

활어시장 겨울바람 흐르는 골목 안으로 사람물결 몰려가고 출렁거리는 흥정소리에 몸부림치는 물고기들의 짠물이 튄다 좁은 수조에 갇혀 숨넘어갈 듯 거친 호흡에 떠나온 바다가 거품 가득 매달리면 도마 위에 흐르는 핏물 개의치 않고 펄떡거리는 살점을 도려내는 칼날 죽어서도 삭힐 수 없는 아픔을 저며 낸다 결코 열지 않을 듯 입을 다문 조가비 돌아갈 수 없는 갯벌의 기억 모두 잃어버릴 때까지 끈적거리는 비린내를 토해낼 때 군침 삼키는 군상들의 호기심만 질퍽거리는 시장 바닥에 왁자지껄하다 2012.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