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雲의 詩/화운의 詩 5 100

꽃의 여왕

꽃의 여왕 -백모란 풍채도 고고하며 향기조차 그윽하다 초록 궁전에 펼쳐놓은 비단옷자락이 눈부신 여왕 오월이 지나면 무너질 옥좌라 해도 어둔 세상 속속들이 밝혀주고 있구나 함부로 그 성에 들어갈 순 없으나 달빛 까마득한 곳에서 그 광채 바라보고 먼 길 날아와 문 두드리면 그때엔 황금왕관 벗어 들고 반겨주지 않겠는가 2012.08.09

점 꽃다운 나이에 명문대가집으로 시집 간 아씨는 대 이을 자손이 없어 남모를 한숨 열두 치마폭에 두르고 깊은 산사를 찾아 치성 드리는 데 꽃 같은 세월을 보냈다 그 지극한 정성이 하늘에 닿았는지 뒷산 뻐꾸기 구슬피 울던 봄날이 지나고 높은 가지 휘어지도록 열린 풋감이 익어갈 무렵 아씨의 몸에서도 새싹 하나 돋기 시작했다 양지바른 처마 밑에 매달아놓은 붉은 땡감이 쪼글쪼글 말라가며 단꿀을 품을 때 부풀어가는 몸속으로 포근한 겨울이 소리 없이 지나갔다 천지사방 진달래 열꽃이 폭폭 터지던 봄날 종가댁 안채에선 우렁찬 사내 아이 울음소리 터져 나오고 기다리던 종손을 보게 된 기쁨이 온 집안에 넘쳤다 보기 드물게 용모준수한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고 하늘에서 축복이라도 내려주듯 소록소록 함박눈 쌓이던 그 해 겨울날 ..

지게의 달인

지게의 달인 - ‘생활의 달인’ 중에서 새벽시장 문 열리기 전 점포마다 물건을 배달해주는 지게꾼 거친 숨 몰아쉬며 어두운 시장통로 달릴 때 짓누르던 등짐 떨구는 소리만이 정적을 깬다 보따리 한 짐 옮겨주는데 이천 원 전신을 휘감고 타오르는 열기에 음료수 하나 빼먹으려 해도 짐삯 반값이라 가슴 여 드는 갈증을 정수기 냉수로 채운다 짐을 지고 달리는 걸음이 어찌 부끄러우랴 일찍이 상경해서 할 줄 아는 게 지게지는 일 멋모르고 시작한 일이 입에 풀칠하게 해주니 수십 년 계속하다 기발한 요령도 생겼는데 많이 버는 날은 탈 없이 버텨준 몸에게 고맙고 적게 벌었어도 떳떳함으로 뿌듯해지는 하루 맨몸으로 고달픈 인생 거뜬히 살아냈음을 세상에 당당히 고할 수 있는 달인이 되었다 2012.07.21

고택古宅

고택(古宅) 산허리 둘러선 솔밭 언덕에 고즈넉한 별채가 있는 한옥 대문 열고 들어가면 또 솟을대문 바깥마당 건너 안마당 지나 외진 툇마루엔 정적만이 앉아있다 이쪽저쪽 첩첩이 마주보는 기와지붕 아래 은근히 열려있는 창살 문 뒷산 청솔 바람 내려와 이방 저 방 넘나드는데 누가 왔나 담장 너머 목을 빼는 배롱나무 곁에서 까치발로 기웃거리던 보랏빛 창포 얼굴에 빗물 털어내느라 수줍게 웃는다 비 개인 오후에 2012.07.16

향사鄕士*

향사(鄕士)* 푸른 솔 둘러선 호젓한 서원 나그네 시름 어리어 백일홍 속잎으로 피어나는데 이루지 못한 선비의 야망 기와지붕 사이사이 젖은 한숨으로 내려앉네 돌아가지 못하는 발걸음 부질없는 그리움만 깊어져 뜰아래 서성이다 담 너머로 향하는데 뒤뜰에 숨어 핀 보랏빛 창포 두고 온 님의 얼굴이네 2012.07.18 *鄕士: 시골 선비. 시골 유생

다시 볼 수 없다 해도/<상사화>

다시 볼 수 없다 해도 - 피천득 님의 을 읽고 차라리 만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걸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는 귀여운 스위트피처럼 아침을 반겨주던 어리디 어린 소녀였지 두 번째 만났을 때는 환하게 피어난 목련꽃 아래 미래의 꿈을 그리며 함께 걸었는데 세 번째 찾아갔을 때는 백합꽃 같던 얼굴 창백하게 시들어 오히려 아니 봄만 못하게 되었지 먼 길 떠나왔어도 보고 싶은 소녀여! 사랑스런 그 모습 다시 볼 수 없다 해도 세월에 파묻힐수록 청순했던 미소는 영영 잊지 못할 거야! 2012.07.05 시집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