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들의 수난
새벽녘에 태풍 '곤파스'가 우리나라를 휩쓸고 지나갔다.
미리 방송에서 예고를 해주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대비는 해두었으나 다소간의 염려를 마음에 담고 잠이 들어서인지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날이 밝기도 전부터 창문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심상치 않더니 점점 드세어지면서 베란다 그 넓은 창이 흔들거리기 시작한다.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잠겨 있지 않은 창문을 살펴보고 있는 대로 다 걸어 잠갔다.
아침이 되어도 하늘은 밝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빗방울까지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점점 빗발이 굵어지고 이윽고 쏟아 붓기 시작한다. 거실에서 창밖을 내다보니 심하게 부는 바람 따라 빗줄기가 옆으로 파도치듯 물결치는 모습이 장관이기도 했지만 무척 겁이 나는 장면이기도 했다. 자연의 제어할 수 없는 힘을 보면서 걱정으로 무거워지는 마음을 추스르며 한동안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날이 밝아 거리에 나가보니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가로수들이 불어오는 강풍에 견디지 못하여 이리저리 찢겨지고 어떤 나무들은 아예 뿌리까지 뽑혀 울타리 너머로 쓰러져 있었다. 서울에 수십 년을 살면서 이런 참담한 광경은 처음 보는 일이다. 도로 통행에 지장을 주는 부분은 임시로 가지를 잘라냈지만 그 주변으로 잘려나간 잔가지들과 나뭇잎들이 어지럽게 보도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중에서도 플라타나스잎들이 심하게 찢겨지고 떨어져 차도뿐 아니라 보도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이따금씩 소나무들도 쓰러지고 부러져 있었지만 유독 잎이 넓은 활엽수들이 더 피해를 받았던 게 신기하다. 그러고 보니 지난겨울 폭설이 내렸을 때, 유난히 소나무들만 상처 입은 장면이 생각이 났다.
몇 백 년씩 자랐음직한 소나무들이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무참히 부러지고 쓰러져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던 일이다. 활엽수들은 이미 잎들을 다 떨어뜨리고 잔가지에 적당한 눈들이 쌓여 있어 눈꽃을 피운 양 아름답기까지 했는데 소나무들은 쌓인 눈을 털어내지 못하여 쓰러지고 부러지고 상처투성이였던 것이다. 그 장면들이 떠오르면서 폭풍에는 여름 나무들이 맥없이 찢겨져 버리고 폭설에는 소나무들만 피해를 입는 현상이 아주 신기하게 대비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자연의 강압적인 위력 앞에선 어느 누구도 만만하게 빠져 나갈 수 가 없는 듯 하다. 이런 경우엔 이런 것이 유리한가 하면 저런 경우엔 저런 것이 유리하고... 한 철 잘 보냈다고 해도 또 다른 철에는 그게 화근이 되니 이 땅에 몸을 의탁하고 살아가는 생명들에겐 사는 것이 마치 곡예 같이만 생각된다.
그러니 어느 누가 한 순간 성공적으로 살아냈다고 해서 천하 만방에 맘 놓고 자랑을 늘어놓을 수가 있겠는가. 계절의 순환 속에서도 사는 동안 무사하면 그나마도 큰 은혜로 여기고 감사해야지 함부로 의기양양해서는 큰 코 다칠 일이다.
2010. 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