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雲의 산책로/화운의 에세이

부러진 소나무

花雲(화운) 2010. 3. 21. 09:12

부러진 소나무

 

 

  3월도 하순으로 접어들어 봄맞이에 마음까지 부풀었는데 때 아닌 폭설이 왔다. 따스해진 봄기운도 있어 추적추적 비라도 내리려니 했지만 저녁부터 내리던 진눈깨비가 아침에 일어나보니 창문 밖 세상이 온통 하얗다. 때 지난 눈밭을 즐기겠다 싶어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아르바이트 나갈 준비를 한다.

 

  버스를 타고 지나는 풍경도 하얀 세상이다. 하얗다 못해 나무든 집이든 엄청나게 뒤집어쓴 눈의 무게를 감당키 어려워 보인다. 나무 밑동이나 가지나 하얗게 둘러싸여 마치 솜을 몸에 두르고 있는 듯 쌓인 눈의 두께를 짐작하게 하지도 못할 정도다.

 태강릉 곁을 지나가다 보니 왕릉을 위엄 있게 지키던 소나무들이 사방 헬 수 없이 쓰러져 있고 심지어는 뿌리까지 뽑혀져 벌러덩 뒤집혀 있다. 지난 밤, 눈 폭탄이 얼마나 심했기에 수백 년을 정정히 살아온 소나무들이 무참하고 어이없게 참살되었단 말인가? 얼마나 많은 눈이 내리누르고 있었으면 그 무게를 감당 못하고 저리 쓰러져 버렸는지 참으로 아연실색이다.

 

  소나무뿐 아니라 참나무들도 눈덩이를 뒤집어쓰고 있는데 의연히 잘 버티고 있는 나무들에 비해 유독 소나무는 더 막중한 무게를 홀로 지고 휘늘어져 힘겨워하고 있다. 다른 나무들은 이미 지난 가을에 낙엽을 다 떨어뜨리고 홀가분히 동면에 들어갔을 텐데 소나무는 여전히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었던 것이 급기야 눈 폭탄의 타깃이 되어버린 것이다. 훌훌 옷을 벗어버린 나무들은 새 옷을 걸쳐 입고 눈꽃을 피운 양 화사한 자태로 의기양양인데 소나무만은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짐이 되어 버거워하는가 하면 아예 버티지도 못하고 쓰러지기까지 해서 의연하다 못해 처연해 보이기까지 하다

 

  때에 따라 거추장스러우면 둘러쓰고 있는 잎을 벗어버릴 수도 있건마는 소나무는 언제나 푸르름의 기상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왕릉을 둘러싸고 천 년을 버텨가는 그 장엄함은 또 얼마나 위풍당당한가. 높은 산 바위 끝에 홀로 서서 모진 비바람을 버티는 휘어진 소나무는 멋스럽기도 하거니와 보는 이의 마음에 고고한 기상을 숭앙하게 한다. 아름드리 소나무 숲에 들어가면 그 상쾌한 공기를 어찌 말로 다 하랴? 그 맑은 정기를 몸 깊은 곳까지 들이마시려 절로 가슴을 크게 벌리고 호흡하게 된다.

 

  그러한 소나무가 때늦은 봄눈에 훼파되어 버렸다. 가지가지마다 적당히 내려앉은 눈은 그림에서나 봄직한 멋진 풍경을 선사해주는데 이 봄에 내린 눈은 그러한 이미지를 아주 짓밟아 버렸다. 다른 활엽수들처럼 빈가지로 겨울을 보냈더라면 이렇게 처참하게 부러지지 않아도 됐을 것인데 언제나 청청한 그 모습이 이토록 엄청난 비극을 맞이하게 된 것은 어쩐지 그에게 아주 괴로운 심사를 견디지 못해서인가 하는 생각도 들게 하는 건 어인 일인지... 남들은 편리한대로 때를 잘 알아서 갖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는데 소나무는 그런 융통성이 없는가,

 

  남들이 꽃다운 채색 옷을 가라 입고 미색을 뽐내도 그저 묵묵히 지기 모습만 지키고 있던 소나무, 옳으면 옳은 것을 지키고 남의 것을 흉내 내지도 않으며 지기 자리만 지키는 자에게는 어쩌면 삶의 무게가 더 실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쉽사리 드러내지 않고 침묵으로 충절을 지키려 목숨을 버리게 되는 충신의 모습과도 같아서 쌓인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부러진 소나무의 처절함이 더욱 진하게 전해져 온다.

 

 

2010.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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