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雲의 산책로/화운의 에세이

어디쯤에서 내리게 될까

花雲(화운) 2010. 1. 29. 14:01

어디쯤에서 내리게 될까

 

 

   "잠시 후면 조치원, 조치원역에 내리겠습니다."

 

  기차 안내 방송이 내려야 하는 승객을 위해 친절히 안내를 해주고 있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자마자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누워서 지그시 눈을 감고 기차 여행을 즐기고 있는데 기차가 정차하는 역에 다가갈 때마다 방송이 울려 나온다. 나의 목적지는 대전이었으므로 안내 방송이 나오면 한쪽 눈만 슬며시 뜨고 정차 역 플랫폼만 슬쩍 보고 다시 덜컹거리는 바퀴 진동의 여운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대전역에 다가갈수록 그때는 고개까지 돌려 창밖을 내다보게 된다.

 

  얼마 만에 타보는 기차 여행인가? 지인의 결혼식이 있어 예식 시간에 맞춰 예매표를 끊고 아침부터 서둘러 서울역에 나갔다. 지하철을 타고 가서 서울역 대합실로 올라가니 벌써부터 왁자지껄한 역사 안의 분위기에 휘말려 나도 어딘가로 떠나는 여행객에 합류해 들뜬 발걸음을 옮긴다. 기차표를 꺼내어 플랫폼의 번호를 확인하고 개찰구로 나간다. 너도 나도 선로에 대기해 있는 기차에 몸을 싣느라 계단을 구르다시피 내려가 두리번거리며 열차번호를 찾는다. 내가 타야 할 열차를 찾아 기차에 오르니 벌써 몇 사람인가는 좌석에 앉아 편안하게 옆 사람과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좌석번호를 찾아 의자에 앉으니 마음은 벌써 철로를 달리고 있고 차창의 풍경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몇 분간의 시간이 지나고 기차는 알아채지도 못하게 서서히 움직이더니 이내 제 속도로 달리기 시작한다. 영등포를 지나고 수원을 지나 하얀 눈이 덮인 겨울 들판을 헤치고 달려간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을 스쳐가고 겹겹이 눈을 덮어쓰고 있는 겨울 산이 벌거벗은 나무들을 껴안고 있다. 여기저기 세워놓은 들판의 건초더미들이 정다운 인사를 건네주고, 강을 건널 때 놀란 철새 떼들이 무리 지어 날아가는 모습이 가슴을 후련하게 해준다. 

 

  창밖의 경치를 즐기고 있는 동안 정해진 역에 기차는 어김없이 정차하고 목적지에 다다른 사람들이 자기 짐을 챙겨 들고 하차하여 바삐 플랫폼을 빠져나가고 있다. 한 손에는 가방을 들고 한 손에 어린아이를 꼭 붙잡고 가는 아낙의 모습, 서류 가방을 들고 전화를 하고 있는 신사, 꼬부라진 허리를 지팡이에 의지하여 힘겹게 걸어가는 할머니, 삼삼오오 등산복 차림을 한 건장한 남자들...... 자기 목적지를 찾아서 서둘러 길을 가고 있다. 떠날 때는 똑같은 장소에서 승차를 했는데 내릴 때는 각기 다른 정차 역에 내려 그들의 갈 곳을 향하여 부지런히 걸음을 옮긴다.

 

  기차여행은 꼭 내려야 할 목적지가 정해져 있어서 목적지에 도착하면 어김없이 내려야 한다. 어쩌다가 정차 역을 지나쳐서 더 먼 곳까지 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차표에 적혀 있는 역에서 내리게 된다. 우리의 삶도 가야하는 목적지와 시간이 정해져 있다면 무엇을 해야 하고 어디까지 가야 할지 헤매지 않아도 될 텐데 사람의 나고 죽음은 그렇지가 못해서 늘 갈등과 후회를 남기게 된다.

 

  이 세상에서 지금 떠나기에는 정말 안타까운 이들도 있는가 하면 더 살아가기 고통스러워 삶의 끝을 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태어나는 시각은 알 수 있으되 죽는 시각은 아무도 알 수 없으니 뜻대로 내릴 수가 없는 것이 인생의 종말이다. 적당한 때를 알아 적당한 곳에서 내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 달려가는 인생에 매달려 괴로워도 힘을 다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목적지는 자신이 정할 수 있으되 목적지에 다다르는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불행한 사고를 당하지 않고 곧장 달려가더라도 이 땅에서의 수고를 마치고 내려야 하는 역은 누구도 알 수가 없는데 과연, 내가 내려야 하는 종착역은 그 어디쯤이 될 것인가. 

 

 

2010.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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