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雲의 詩/화운의 詩 3 100

꽃과 여인

꽃과 여인 꽃은 여인이다 한껏 차려 입고 나들이 나온 그녀에게선 진한 분 냄새가 진동을 한다 낡고 초라한 책상 위에 꽂혀있는 한 송이 꽃으로 등불을 켜면 침침한 방안이 환해지지 않던가 향기 찾아 드나드는 벌 나비에게 달콤한 꿀 아낌없이 내어주다가 이윽고 눈물처럼 꽃잎 떨구며 소리 없이 아픔을 참아낸다 떨어진 꽃자리에 인내의 열매를 기르는 그녀는 다름 아닌 생명의 불꽃이요 어머니다 2010.04.14

꽃이 먼저 피는 이유

꽃이 먼저 피는 이유 차가운 눈밭 위로 매화가 얼굴을 내밀면 산수유 개나리가 방실거리고 진달래 목련이 눈부실 때쯤 벚꽃이 일제히 함성을 터뜨린다 봄날의 꽃나무는 어째서 싱그런 잎을 마다하고 여리디 여린 꽃잎부터 피우는 걸까 아직도 잎새는 잠에서 깨어날 생각을 않는데 성급히 얼굴부터 내미는 꽃송이는 세상 무서운 것 모르는 어리디 어린 아이 같다 춤을 추는 아지랑이 쫓아서 흥겨운 잔치마당에 몰려온 아기천사들에게 심술 가득한 겨울바람이 샘을 낸다 2010.04.12

바람의 목소리

바람의 목소리 바람도 때로는 아주 작은 소리로 흐느낀다 겨울 밤 문풍지를 붙잡고 덜덜 떨면서 더러는 큰소리로 울부짖기도 하지 먹구름을 몰고 와 하늘 문 쾅쾅 두드리면서 늘 쫓겨 다니는 그의 슬픔을 아는가 바람도 아늑한 곳에서 사랑의 속삭임을 나누고 싶어한다 조그만 흙 피리의 숨소리로 호소하는 천상의 노래로 외로워하는 가슴 안에서 떨리는 감동으로 살고 싶어한다 2010.04.10.

어린 날의 詩人

어린 날의 詩人 꽃을 보면 기쁨이 솟았다 바람의 길을 따라 걷다가 비를 맞으며 공연히 울먹였다 하얀 구름 흘러가는 날이면 누군가를 기다리느라 산을 넘는 노을이 붉게 타오를 때까지 보고 서 있었다 구슬픈 노래를 들으며 사랑을 갈구하던 나이 봄비에 떨어지는 꽃잎을 줍다가 밤늦도록 신열을 앓고는 밤하늘에 떨어지는 별을 보고 통곡했다 재미있는 놀이에도 구경만 하며 나무 뒤에 숨어서 입술을 깨물던 아이 지금도 요동치는 바닷가에서 조개껍질 주우며 파도소리 듣기를 좋아한다 2010.04.05

봄비가 말하기를/<상사화>

봄비가 말하기를 겨울은 너무 길어서 지루했다고 반가운 님 언제 오시나 미리 나가 보았다가 꽃샘바람에 놀란 가슴 먼 까치발로 바라보기만 했네 겨울은 너무 추워서 아팠다고 얼어붙은 눈밭을 걸어가려니 몰아치는 눈보라가 맵고 따가워 한겨울이 지날 때까지 참아야만 했네 혹독한 시절 지나 땅 밑에 잠자는 벗님들 부르자 촉촉한 얼굴 내미는 개나리 기지개 켜며 눈웃음 짓는데 참말이지 기다림은 길지만 만남은 너무 짧아! 2010.04.04 시집 게재

단풍나무의 인(印)

단풍나무의 인(印) 날 때부터 화인(火印)이 찍혀 평생 주홍글씨를 새기고 살아야 했습니다 푸르르고 싶은 건 오직 꿈에서만 가능한 일 용서 받지 못할 죄의 흔적인가요 타는 여름이 못 박히는 날 천둥소리 울며 울며 두려운 땅에 단비를 부어주었습니다 어둠을 따라가며 따가운 눈총을 던지는 자 비웃으며 조롱하는 그들은 미처 모르고 있습니다 백설이 천지를 덮어주는 고요한 밤 저만 홀로 감격하여 진홍빛 두 손 모으고 하늘을 우러르고 있는 것을…… 2010.04.02

이런 나무가 되기를

이런 나무가 되기를 땅에 몸을 심고 하늘을 마시며 서 있는 너는 어떤 나무가 되고 싶으냐 아담한 연못가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거나 노란 깃발 흔들며 반가운 인사를 건네주는 가로수가 되어도 좋겠다 위로 높이 자라나지 못해도 양지쪽에 나직이 서서 달고 탐스런 과실을 맺으면 더없이 풍성해질 꺼야 비록, 깊은 산 속에 있어 아무도 돌아보지 않아도 이 땅 위에 생기 넘치는 봄날이 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희망이 되어주렴 2010.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