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雲의 詩/화운의 詩 9 70

하얀 목련

하얀 목련 하얀 목련이 된 것은 흠없이 사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순백으로 사는 길은 무엇하고도 타협할 수 없기에 외롭기도 하겠지만 어떤 고뇌와도 융합하지 못해서 가장 어려웠던 삶을 벗어내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지나가면 지나가는 대로 다가오면 다가오는 대로 한 걸음 물러서서 느껴지는 숨결 따라 흐르고 싶다 오직 홀로 견디고 스스로 가난하여 많고 적음을 바라보지 않는 무욕의 자유 창백하게 곱지만 헛꿈 꾸지 않아서 오히려 고상한데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은 채 무심히 지는 모습이 처연하다 2021.03.31

역광(逆光)

역광(逆光) 앞만 보고 있으면 뒤가 얼마나 어두운지 모른다 돌아보지 않으면 그곳이 얼마나 환한 지도 모른다 보이는 허상에 얽매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실상을 넘어서 보는 광명 엷게 비치는 꽃잎 뒤로 기울어가는 햇빛을 본다면 가려져 보지 못했던 맑음이 얼마나 눈부신지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앞에서만 보아 왔던 빛보다 그 뒷그림자가 얼마나 그윽한지... 2021.05.05

신록의 하루

신록의 하루 우리에게도 꽃 같은 시절이 있었지 백목련은 떠나갔어도 자목련이 와서 길을 밝히네 얼마나 고운지 붉디붉은 꽃잎이 고와서 눈이 아리네 우리도 곱다 못해 빛이 났었지 차디찬 눈길에 묻혀있어도 맥박은 쉴 새 없이 뛰고 있었네 얼마나 멋진지 뜨겁게 살아온 가슴이 아직도 목마르네 숱한 봄날을 보내며 꽃처럼 흔들리다 시들겠지만 사랑에 웃고 이별에 울면서 쓰러지지 않고 걸어온 바람길 꽃들이 피었다가 지는 것처럼 우리도 서산에 기울겠지만 황혼에 신록이 깃들어 푸른 바람 속에 두근거리는 하루였네 2021.04.15 봄날의 벗님들에게 드립니다.

사람이 외로우면

사람이 외로우면 사람이 행복하면 그다지 애달파하지 않는다 내 안이 충만해서 필요한 게 있어도 욕심내지 않고 거슬리는 게 있어도 이해하고 넘어간다 안타까워 배려하는 마음에 양보를 해도 아깝지 않다 사람이 외로우면 쉽사리 슬픔에 젖는다 채워도 공허해서 가슴 문드러지도록 취하고 싶고 방금 헤어진 사람이 다시 보고 싶어진다 선물을 받아도 흡족하질 않아 가진 것을 나누지도 못한다 외로운 사람이 더 많을까? 행복한 사람이 더 많을까? 시시때때 자존감을 잃어버려 떠들썩한 즐거움을 찾아다니고 받으면 어쩐지 불안해서 원하지도 않는데 자꾸 주려는 걸 보면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2021.03.14

꿈에서 쓰는 詩

꿈에서 쓰는 詩 불현듯 그럴 듯한 글귀가 떠올랐다 영감적이고 신선해서 몇 번이고 되뇌다 서둘러 필기구를 찾는다 아! 모처럼 시 한 편이 되겠구나! 멋진 시가 될 거야! 너무 좋아서 웃는다 신이 나서 소리 내어 웃는다 그런데 웬 일? 웃다 보니 꿈이다 창문으로 햇살 비쳐오고 새들 날아다니며 노래하는데 꿈에서나 만날 법한 싯귀가 한바탕 웃다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2021.03.13 2021.05 5월호 신작시

이 세상 끝까지

이 세상 끝까지 이 세상 살면서 하고 싶은 것 무엇이 있을까? 먹고 싶은 것도 많고 갖고 싶은 것도 많지만 여러 세상 다니며 구경하고 싶다 이 세상 살면서 알고 싶은 것 무엇이 있을까? 가장 넒은 것이 무엇인지 가장 높은 것이 무엇인지 가장 큰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그렇다면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사람답게 살아가는 도리가 제일이겠고 부모와 자녀가 언제나 마음에 밟히니 자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못할까?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삶의 길 세상 떠나면 모든 것이 끝인데 이 세상 끝까지 가 본 사람 누가 있을까? 2021.03.18

돌 꽃

돌 꽃 얼굴을 들 수 없어 바위 속에 숨었다 끓는 불구덩이에서 도망치지 못하고 형벌의 감옥에 갇혀야 했던 최후의 그날 존재를 감추고 싶어 묻혀있다가 갈고리에 걸려 세상 밖으로 끌려나왔다 아무도 꽃인 줄 몰랐다 차라리 맑은 물 흐르는 깊은 계곡에서 물소리 새소리 들으며 남아있는 허물 씻고자 해도 상처투성이로 아무도 모르게 박혀있을 수 없었는지 송곳 같은 눈에 들켜서 곤욕을 치른다 치욕을 벗지도 못한 채 깎이고 쪼여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얼굴 남들은 돌 속에 피어난 꽃이라고 환호하지만 숨기고 싶은 수치심은 원죄로 굳어졌다 제발 그대로 두어라! 뻔뻔한 속살 드러내고 싶지 않을 테니 속죄하는 꽃으로 영원히 피어있게 제발 내벼려 두어라! 2021.03.13

바람으로 살자

바람으로 살자 봄눈 녹은 언덕으로 바람이 분다 눈보라는 마지못해 떠났지만 따라가기 추워서 가다가 되돌아온다 푸르게 물든 댓잎 사이로 바람이 분다 가진 것도 없고 갖고 갈 수도 없어 날지 못하는 것들을 대신해서 날아간다 서산 너머 붉은 노을 따라 바람이 분다 샛노란 청춘 부질없이 보내고 조상을 알지 못하듯 후손도 없이 가고자 하는 곳도 따로 없이 정해놓지 않아도 자유롭게 흐르면서 누구에게도 깃들지 못하더라도 아무 때나 멈추지 않는 바람으로 살자 2021.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