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 대한 아포리즘
―시는 삶일 뿐이다
洪海里 시인
- 시는 봉숭아 꽃물 들인 그대의 새끼손가락 손톱 속에 내리 는 첫눈이다.
- 시는 희망이요 절망이다. 희망의 번개요 절망의 천둥이다.
그리하여 조화요 혼돈이고 혼돈이며 조화이다.
- 시는 눈내린 오솔길이다. 그 길 위에 찍혀 있는 한 사람의 발자국에 고여 있는
순수한 고요이다.
- 시는 울음이요 얼음이다. 웃음이요 차돌이다.
- 시는 갓 창호지를 바른 지창이요, 그곳에 은은히 어리는 따수운 저녁 불빛이요,
도란도란 들리는 영혼의 울림이다.
- 시는 가슴에 내리던 비 그치고 멀리 눈밖으로 사라지는 우렛소리이다.
- 시는 실연의 유서이다. 말로 다 못하고 남겨 놓은 싸늘한 삶의 기록이다.
- 시는 흙이다. 검고 기름지고 부드럽고 따뜻한 흙의 가슴이다.
- 시는 맑디맑은 눈빛이다. 핑그르르 도는 눈물이다. 그 눈물이 오랫동안 익고 익어서
빚어진 보석이다. 눈물의 보석이다.
- 시는 연잎이나 토란잎에 구르는 영롱한 물방울이거나 풀잎 끝에 맺혀 아침 햇살을
받고 있는 이슬방울이다.
- 시는 화살이다. 막혀 있는 그대의 가슴에 피가 돌게 하는 금빛 화살이다.
- 시는 푸른 소나무 바늘 사이를 빠져나온 바람이다. 순수의 강물 위에 흐르는 맑은
바람이다.
- 시는 만추에 피어나는 새싹의 파아란 볼이다. 늦가을을 다시 봄이게 하는.
- 시는 절집에 배달려 있는 뼈만 남은 물고기의 '잠을 깨라, 깨어 있어라'하는
뜨거운 외침이다.
- 시는 잠 속의 꿈이요 꿈속의 잠이다.
- 시는 깊은 산속 솟아오르는 충만한 옹달샘물이다.
- 시는 초록빛 춤을 추는 나무다. 그것은 이상과 휴식과 안정과 평화를 가져다 준다.
- 시는 기다림이요, 그리움이다, 사랑이다, 늘 차지 않아 안타까운 빈 잔이다.
- 시는 마지막 불꽃이다. 가슴에 타오르는 불꽃이다. 모든 것을 다 태우고 다 타버린
것까지 다시 태우는 불꽃이다.
- 시는 상상력의 증폭기이다. 순간과 영원을 함께하고 극락과 지옥을 같이한다.
- 시는 사춘기의 꽃이다. 떨리는 가슴의 언어를 엮어 따스한 마음을 전해주는
대행기관이다.
- 시는 문학의 원자요 결정체이다. 모든 문자로 된 매체는 시로 시작해서 시로 끝나야
한다.
- 시는 가장 정교하고 우아한 의상 전시장이다. 그 의상을 입은 사람들은 스스로
빛이 난다.
- 시는 집중이다, 중심이다.
- 시는 첫눈이고 첫서리이고 첫얼음이다. 첫 성에이다. 그리하여 첫사랑 같고
첫 키스 같고 첫날밤 같아야 한다.
- 시는 독주다. 사내들의 우울한 가슴을 태울 100%의 순도를 지닌 독주의 순수 ·
투명함이다.
- 시는 우리 나라 비평가들의 밀가루 반죽이다.
- 시는 정신의 건전지이다. 피로한 정신의 기력을 채워주는 생명공학이다.
- 시는 백담계곡의 맑고 찬물에 노니는 열목어의 붉은 눈빛이다.
- 시는 언어의 사리이다. 자신을 태워 만드는 스스로의 사리이다.
- 시는 사랑이다. 항상 막막하고 그리웁고 안타깝고 비어 있어 허전하고 늘
갈구하며 목말라 한다.
- 시는 똥이다. 잘 썩어 우리들의 영혼의 자양분이 되는 향기로운 똥이다.
- 시는 미늘이다. 영혼의 탈출을 막는 날카로운 미늘이다.
- 시는 다이아몬드이다. 사람이 사는 빈 자리마다 푸르게 빛나는 영롱한 보석이다.
- 시는 새벽녘에 갓 잡아올린 신선한 생선이다. 그 금빛 비늘이다.
- 시는 삶이다. 삶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시는 삶일 뿐이다.
시집『愛蘭』(우이동사람들.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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