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란 무엇인가? 3
* 사진 찍어 잡지에 한 번 발표해보기 / 박남철
시는 괄호하고 대학교수이다. 아니, 시는 먼 산을 바라보면서 사진 찍어서 잡지에다 한 번 발표해보기이다. 아니, 시는 손을 턱에다 괴고서 사진 찍어서 잡지에 발표해보기이다.
(4년 전에 옛날 카메라를 잃어버려서, 4년 전 사진들밖에 없어서 ‘디카’를 새로 샀다. 사진들이 잘 나와주어야 할 텐데……) 아니다, 시는 마이클 잭슨처럼, 혹은 나처럼, 사타구니 쪽에다 손을 갖다대고서, (“으!”), 사진 찍어서 잡지에다 한 번 발표해보기이다.
(“Dangerous!”) [아무튼, 사진만은 잘 나와주어야 할 텐데…… 그래야 ‘중앙대 여자 교수’하고라도 어떻게 결혼이라도 한 번 해볼 수가 있을 텐데……]
아니다, 시는 어떤 노회한, 그래봤자 노후할 뿐인 어떤 늙은 노벨상 후보선수처럼,
(“으!”), 엉덩이를 들었다 놓았다, 털었다 놓았다를 그토록 열심히 반복해대면서,
(“흐!”), ‘후장-엉덩방아-춤’이라도 한 번 추어대면서, 북-유럽-적인 관객들 앞에서
시낭송이라도 한 번 해보는 것이 아닐 것인가? 오, 진정, 여한이 다 없을 일일지로다!
(“으이!”)
* 생을 사랑하는 엄혹한 시선 / 박주택
시에 있어 경험은 매우 중요하다. 경험은 내용과 형식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경험이 시를 지배할 때 시는 일상의 모습을 띤다. 그런데 일상이 시간과 공간을 거느리며
의식을 지배한다면? 그것은 실재, 진실, 감동 등과 어울려 오래된 시적 미학을 구성하는 데 바쳐질 것. 따라서 경험과 일상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가 중요한 시의 덕목. 그렇다면 일기를 쓰듯, 체험을 고백하듯, 기억을 복기하듯 시를 쓸 것인가? 의식은 무의식의 실재이자 주변. 경험은 추체험의 토대이자 주변. 따라서 경험, 일상, 실재, 진실, 감동 등에 지나치게 매이지 않는 자재自在가 필요하며 무의식, 추체험, 입체성, 생의 깊이 등을 사랑해야 할 것. 그리고 전체성의 측면에서 자신의 시와 우리시를 성찰하는 엄혹한 시선이 있을 때 시는 한층 시다워질 것이다
* 시는 허기진 사람에게만 약동한다 / 박형준
우리는 자신의 입장에서 무엇인가를 보고 심지어 그것을 제맘대로 갖고 싶어하지 사물이나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을 보거나 자신이 가진 것을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사물의 입장에서 자신을 보게 되면 나와 사물 사이에 침묵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침묵은 일견 아무 힘이 없는 것 같지만 우리 마음에 파동을 일으키는 물결을 지니고 있다. 침묵은 아무 말도 말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말하는 방식이다.
그러한 침묵은 우리에게 허기를 일깨운다. 허기는 ‘안’에서 느끼는 것이지 ‘밖’에서 느끼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허기에는 얼마나 격렬한 숨죽임이 있는가. 허기는 또한 비움이며, 그 비움이 아름다움을 불러온다. 나는 비워서 충만해지는 상태가 아름다움이라 생각한다. 삶 혹은 시는 허기진 사람에게만 약동한다.
* 가인歌人 / 손택수
ㅡ그리고 일현금一絃琴들의 단 한 줄
―― 아폴리네르
아폴리네르(프랑스, 1880-1918)에 따르면 시는 단 한 줄로 된 현악기다. 그 한 줄은 제목과 본문 사이에, 가인과 악기 사이에, 사물과 꿈 사이에 아슬하게 걸쳐져 있다. 그 한 줄은 잘 벼린 수평선처럼 서늘하고 투명하게 가슴을 벤다. 그리고 복화술사처럼 한 일一자로 두 입술을 포갠 채 무수한 파도를 일으키며 다채색의 진동음을 낸다.
그러나 수평선은 본디 없는 것이 아닌가. 멀찌감치 물러나서야 눈에 들어올 뿐, 다가갈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없는 그 한 줄, 그러나 분명히 시인의 가슴을 버히고 간 상처 자국, 부재하는 아름다움이 우리를 노래하게 한다. 비계살 많은 내 시의 살갗이 축축 늘어지고 굳은살이 배길 때면 시퍼런 작둣날 위에 올라선 무당처럼 가끔씩 중얼거려보는 이 한 줄, 시라기보다 그것은 이제 무슨 주문처럼 느껴진다. 섬뜩하다.
* 우주와의 화해 / 신달자
내 몸과 내 정신이 말하는 것을 받아 적는 것, 내 몸과 정신의 난타 공연, 내 몸과 정신에서 도저히 그대로 머물 수 없는 비명과 명상이 세상 밖으로 비집고 나오는 것, 내 삶의 경험을 통해 내가 존재하는 자연을 통해 내 시선을 통해 내 감각을 통해 일어나는 현상, 혹은 정신에서 괴어 오르는 함성을 내 언어로 오래 묵혀 발효시킨 한 잔 술이다. 내 뼈 안에서 울리는 내재율이다. 혹은 모든 사물과의 부딪침 충동, 그리고 우주와의 화해.
* 황야의 눈 / 신대철
처음 내게 다가온 시는 하나의 뭉쳐진 말이었다. 새들이 풀잎을 말아 아름답게 틀어 놓은 둥지 같은 말이 아니라 온몸을 찌르는 결석 같은 통풍 같은 말이었다. 시를 쓰지 않을 때에도 그 통증은 기억 속에 그대로 살아남아 밤마다 괴롭혔다. 극지를 떠돌면서 나는 그 말이 으르렁거리고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비통한 신음소리 같기도 하고 끝없이 갈구하고 분노하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 생명의 소리는 강렬한 생의 의지 없이는 마침내 그 원초적인 생명성을 잃었다.
그동안 내가 언어로 포획한 시는 대부분 시가 아니었다. 언어가 죽고 소리만 남지 않는 한, 체험된 말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현장을 불러내고 살아 있다고 외쳐대지 않는 한. 최근에는 황야의 눈을 가진 늑대 같은 시를 쓰고 싶다.
* 토끼와 구름, 하늘 높이 띄우기 / 신현정 “토끼에게서는 달의 향기가 난다// 분홍눈은 단추 같다//앞이빨이 착하게 났다// 두 귀를 잡고 공중으로 들었다가 내렸다도 해 보았다// 토끼를 기화 혹은 발화, 부유의 동력인 구름으로 띄워보았다. 어쨌거나 지상에서 너무 높다랗게 띄웠음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또 다소 몽상적이기도 해서 누가 이 시대에 달이나 바라보는 퇴행의 뒷모습을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니요 한다 해도 할 말이 없다. 염치불구하고 한 번쯤 극단의 절반만이라도 멋진 고공 비행을 해보자는 계산을 깔고 선택한 것이 토끼와 구름이었다. 당분간은 이런 결벽증에 가까운 개결미의 순진한 놀이를 즐기기로 한다. 어디까지나 존재 자체를 헐겁게 느슨하게 페이소스하고 싶었던 것인만큼 부디 용서해주시기 바란다. * 저녁연기 같은 것 / 오탁번
ㅡ졸시 '토끼에게로의 추억'으로 시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토끼의 두 귀를 꼬옥 쥐어봤으면 했다// 몽실했다//
토끼와 시이소를 타고 싶었다// 그러면 토끼는 올라가고 나는 내려오겠지//
토끼는 구름이 되겠지// 아하함 이참에 토끼와 줄행랑이나 놓을까.”
ㅡ시는 저녁연기 같은 것이다.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마을, 초가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저녁연기가 바로 시다.
해가 지는 것도 모른 채 들에서 뛰어 놀다가 터무니없이 기다랗게 쓰러져 있는 내 그림자에 놀라 고개를 들면 보이던 어머니의 손짓 같은 연기, 하늘로 멀리멀리 올라가지 않고 대추나무 높이까지만 피어오르다가, 저녁때도 모르는 나를 찾아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논두럭 밭두럭을 넘어와서, 어머니의 근심을 전해주던 저녁연기, 이게 바로 시다. 저녁밥을 먹으려고 두레반 앞에 앉으면, 솔가지 타는 내가 배어 있는 어머니의 흰 소매에서는 아련한 저녁연기가 이냥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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