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란 무엇인가? 8
5. 진언眞言에 대한 갈망
진언은 보통 주술적 언어를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진실한 말, 적실한 말, 울림과 감동이 있는 말, 존재의 핵심을 포획한 말 등과 같은 의미로 이 말을 평범하게 사용하고자 한다. 이번의 응답에서 시인들의 언어에 대한 관심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기존의 시론에서 시가 언어의 양식이라는 점을 크게 역설한 것에 비추어본다면, 이번에 시인들이 언어에 대해 보여준 관심은 다소 낮은 게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그들의 언어의식은 살펴볼 만하다. 다같이 언어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였다 하더라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시인마다 상당한 차이를 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채호기는 시를 “언어적 구성물”로 규정한다. 이 규정 속의 ‘언어’라는 말도, ‘구성물’이라는 말도, 관심을 끈다. 하지만, 언어도, 구성도, 인공이기에, 그는 언어의 질서를 버리고, 구성의 질서를 버리고 시라는 실재에 합치하는 일에 대해 고민한다. 그때 그는 몸의 질서로 언어와 구성의 질서를 보충한다. 여기서 몸의 질서는 인공의 언어를 진언으로 만드는 육성의 숨결이다. 그렇다면 육성과 문화적 언어가 만나는 자리, 그 자리가 그에겐 시이다.
허만하의 시론도 흥미롭다. 그는 시를 가리켜 “다른 방법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언어실천”이라고 한다. 결국 시란 그 방법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드러내기 위한 고도의 화법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대체 그 무엇을 말하려고 하기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는 도저히 그것을 드러낼 수 없다고 하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허만하의 이어지는 글을 보면 그것은 절대자유의, 자존의 절벽 같은 세계이다.
이 세계는 그에게 신성하다. 그것은 진실이고 그것을 드러내는 화법으로서의 언어는 진언이다.
조정권이 시의 언어를 사유 이전이거나 사유 이후의 “심득心得된 말”로 규정한 것, 김종해가 시어를 밀실의 암호 같은 존재라고 규정한 것, 이승하가 시어를 극점의 언어이자 극한의 언어라고 고백한 것, 이 모든 것은 다 언어의 절대성 혹은 절대적 언어에 대한 갈망을 전달한 것이다. 도저히 다른 것으로 교체될 수 없는 언어, 비의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언어, 틈 없는 몸의 언어, 그런 언어를 그들은 시에서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언희의 언어관과 장석주의 언어관은 독특하다. 김언희는 숟가락과 같은 언어로 단지가 표상하는 대상과 우주의 무한성을 겨우 가리거나 가리키는 것이 시쓰기라 말하고, 장석주는 거대한 부재의 권태를 견디거나 극복하고자 하는 안간힘이 문자(언어)를 동원하는 까닭이라고 한다. 이들 시인에게 언어는 한계의 산물이고, 이승의 어쩔 수 없는 행위이다. 그렇더라도 그들 역시 그들의 언어가 진언이 되기를 소망하는 꿈만은 동일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헛된 반복을, 그것이 비록 다른 반복이라 할지라도, 그토록 오랫동안 계속할 수는 없을 터이니까 말이다.
한편 이수익은 직접 언어라는 말을 시론에 표명하지는 않았지만, 시어가 관념화와 추상화를 넘어 “너무나도 확실한 물증”이 되어야 한다는 뜻을 드러내고 있다. 물증은 감각으로 확인되는 세계이다. 그때 언어는 물질과 한 몸이 된다. 그리고 존재와 언어 사이에 틈이 없어진다. 소위 언어의 물화작용이 철저하게 일어난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실상實相의 언어라고 부르면 안 될까? 실상은 진언으로써만 가까스로 다가갈 수 있는 진공眞空의 세계이다.
6. 글을 마치며
이번의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시인들의 견해를 살펴봄으로써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먼저 그들에게 시는 텍스트로 대상화되기 이전에 그들의 삶 자체였고, 인생 그 자체였다. 그것은 문화 이전의 생물학적 육성이나 활동과 같은 것이었으며, 그들의 온전한 삶을 영위해 나가는 절실한 행위이자 생생한 행위였다.
둘째로, 그들은 기존 시론의 대부분을 이루어 온 이른바 분석시론의 영향권에서 거의 벗어나 있었다. 그들은 아무도 비유니, 이미지니, 리듬이니, 문체니, 기승전결이니 하는 메마른 수사학적 기법을 역설하 않았다. 그들이 언어를 비롯한 수사학을 언급한다면 그것은 삶과 몸과 생명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셋째로, 그들은 시에 대한 자부심을 여전히 크게 지니고 있었다. 시인됨을, 시쓰기를, 시라는 존재를 드높은 인간문화의 양식으로 설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재무가 시인은 금기와 싸우는 자라고 규정한 것, 김광규가 시를 도구화에 항의하는 마지막 노래라고 규정한 것, 허만하가 인간은 시를 발견함으로써 비로소 짐승과 구별될 수 있었다고 말한 것 등은 이런 경우의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넷째로, 그들은 여전히 이상주의자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들은 지예至藝가 지도至道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꿈을 갖고 있었고, 그들의 시적 선택을 비장하게 여기는 고전적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나태주가 시는 “시인이 선택한 가시면류관”이라고 하였을 때, 이런 점은 극에 달한다.
끝으로 한 가지만 더 언급하고자 한다. 그들에게 시는 교훈적이거나 계몽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 중 누구도 시의 교훈성과 계몽성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대화나 고백의 자세를 취하였다. 역시 그들은 경직된 사회성과 역사성도 거의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시가 그만의 자율성을 버리기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정효구 / 서울대학교 국문과 석사, 박사학위 받음. 1985년 《한국문학》에 문학평론으로
등단. 저서 '존재의 전환을 위하여' '시와 젊음' '몽상의 시학: 90년대 시인들'
'시 읽는 기쁨' 등 다수 있음. 현재 충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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