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란 무엇인가? 2
* 시가 무어냐고? / 김종철
장자도 말했고 공자도 말했고, 40여 년 전 저 아득한 미아리 낡은 강의실에서 목월도 말했고 미당도 말했고 김구용도 학생들에게 담배를 빌려 피우며 말했고 소설 창작을 가르치는 동리도 불쑥 한 마디 했던 그것! 오늘은 나도 한 마디 할란다, 똥이야!
* 살아 있는 암호 / 김종해
내가 너에게 아무도 모르게 ‘사랑한다’는 암호를 편지에 써서 보냈는데, 너는 남들이 모르는 그 암호를 곧 독해讀解하고 답신을 보내왔다. ‘사랑한다’는 나의 말은 너에게 전달되고, 너는 답신 속에 또한 암호를 보내왔다. 나는 그 암호를 받고 기뻤으며 전율하였다.
두 사람이 내통할 수 있는 암호는 두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시의 한 전형典型이 된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암호의 압축, 축약된 문맥과 색깔, 상상력과 율동, 그 어법 속에 살아 있는 시의 혼을 담아내는 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 시인의 몫이다.
* 시, 줄타기의 언어 / 김중식
한때 내게 시는 ‘끝까지 가는 것’이었다. 그것만 ‘진짜’였고 나머지는 다 ‘가짜’였다. 지금은 이렇게 말하겠다. 시는 적당적당的當適當히 가는 것이다. 끝까지 갔다가, 또는 끝까지 가려다 무서워서 되돌아나오는 비겁의 자리가 시의 마음자리다. 양극단을 다녀온 가운뎃점이라 할 만하다. 경經과 선전포고가 시보다 더 훌륭하다. 하지만 시는 성聖의 비듬과 각질이며, 시는 속俗의 하품과 재채기이다. 해탈의 포즈는 위선이어서 가증스럽다. 자폐의 방백도 위악이므로 못마땅하다. 어느 쪽이든 비루한 삶의 자리로 생환해야 시다. 시는 어쩔 줄 모르는 삶의 흔들리는 언어다. 시는 흔들리는 삶의 어쩔 줄 모르는 언어다.
* ‘나’라고 생각해본 적 없는 ‘나’의 출몰 / 김행숙
내게 시는 인식론적인 대상으로 ‘저만치’ 놓여 있지 않다. 그렇다고 시인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나 장소에 비견될 수 있는 범주도 아니다. 시는 글쓰기의 ‘사건성’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사태 속에서 움직인다. ‘쓴다’라는 행위 이전에 작품은 어디에도 없다. 작품의 기원은 작가의 ‘머릿속’에(‘가슴속’에도) 있지 않다. ‘사건’은 벌어지는 것이며, 충돌하는 것이며, ‘의외’의 방향으로 번지는 것이다. 사건 속에서 ‘나’는 주도자가 아니라 반응하는 자일 뿐이다. 나는 반응하고, 사랑하고, 폭발하고, 반사하고, 흡수하고, 뺏기고, 훔치고, 달아나면서, ‘나’라고 생각해본 적 없는 ‘나’는 출몰한다. 그러므로 낯선 것(새로운 것)을 시로 쓰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쓰면서 우리는 낯설어지고 새로워진다. 영원히 시는 충분히 알려지지 않으리라.
* 상처가 시를 낳는다 / 김후란
시는 그리움의 소산이다. 날마다 그립고 날마다 새롭다. 시인의 정신세계는 무한대여서 어느 선현의 말씀처럼 ‘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세상을 보면서’ 산다. 상처가 조개 속에 진주를 키우듯이 삶의 손톱자국이나 어느 순간의 감동이 시의 씨앗이 되고 한편의 시를 낳는다. 시를 쓰는 일은 축복된 일이며 좋은 시를 쓰기 위해 부단히 고민하고 감성을 연마하는 일은 나의 삶을 정련하는 행복한 길이기도 하다. 문득 가슴에 울림이 있을 때 가장 적은 말로써 보다 크고 넓고 깊은 세계를 열어보이는 문학세계, 한 편의 시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깊은 뜻까지도 마음에 새기면서 무언가 인간세계에 따뜻이 손 잡아주는 한 역할을 우리 문학인들은 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오늘도 시인은 시를 써서 하늘의 별자리에 올려놓는다.
* 가시면류관 / 나태주
장님이 문고리 잡듯 잡은 신비였다. 평생을 놓지 못했다. 지난해, 죽음의 골짜기에서 보름만에 탈출하고서도 제일 먼저 찾은 것이 종이와 펜이었고 역시 맨처음 시도한 일이 시쓰기였다. 시는 시인 스스로 선택한 형벌. 하므로 시는 시인에게 고통과 함께 쾌락을 준다.
때로는 쓰러뜨리기도 한다. 하지만 일어나는 방법은 오직 시쓰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참으로 모순이요 이율배반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하기사 우리네 인생 자체가 그렇지 않겠는가. 어려운 말이나 까다로운 구문으로 시를 현혹시킬 일이 아니다. 평이한 문장과 단어 속에 보다 깊은 삶의 뜻을 새기고자 한다. 인생의 발견을 담고자 한다. 하면서도 솔직해지고자 한다. 시인이여. 부디 시건방을 떨지 말자. 아는 척, 잘난 척도 하지 말자. 깨달은 척은 더더욱 금물! 오늘도 내일도 시는 그저 시일 따름. 시는 시인이 선택한 가시면류관이 아니던가! 나에게 주고 싶은 말이다.
* 볼 수도 잡을 수도 없는 / 노향림
시는 나에게 꿈과 고통을 동시에 안겨주는 삶 자체다. 시는 언제나 실체를 보여주지 않는 그 무엇이다. 그 불가사의한 매력과 매혹 때문에 그리하여 시는 언어 그 자체라고 믿고 싶다. 시는 끝내 그 실체를 보여주지 않고 언어만 덩그마니 내 앞에 놓아두고 떠나버리기 때문이다. 실체를 보여주지 않아 밤새워 시를 탐색해 보면 하얀 손톱만 한 먼 우담바라 꽃이
아롱져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진짜 우담바라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것은 볼 수도 잡을 수도 없다. 단지 풀잠자리의 알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왜 언어에게서 늘 상처를 받으며 언어의 경계를 또 넘어서려고 하는 걸까. 언어 그 체를 믿고 또 믿는 것일까. 예술은 절대적으로 새로워야 한다는 명제가 엄연히 존재하는 한 그 새롭고 새로울 뿐이라는 엄정함에 놀라울 뿐이다. 그래서 더욱 분명한 실체를 보여주고 싶어 나의 시는 이미지와 묘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시에다 쉴새없이 긴장과 이완을 되풀이하며 비어 있는 것에는 사물의 존재를 채워주고 채워져 있는 것에는 끝없이 그 의미를 제거하는 이중적 구도를 선호하는 내 성격 탓일까. 시는 꿈과 고통을 동시에 안겨주는 내 삶 그 자체다.
* 사람의 냄새가 배어 있어야 / 문인수
“길은 식물의 물관부와 같은 것일까. 한참 빨려 들어가다 보면 사람이, 사람의 영혼이
문득 새로 눈뜨거나 피어나는 데가 있다. (중략) 정선에서 우포늪에서 섬진강 가에서 나는 잠시 서 있었고, 그때 내 삶의 궁기가 보였다. 그걸 베껴 적었다.” 내겐 이것이 시가 되었다. “재미라는 말 안에 인생 전부, 전반을 우겨넣고 말할 수 있다면, 그렇게 말해본다면
나는 시 쓰려는 궁리, 쓰는 노력보다 더 그럴 듯한 일이 없는 것 같다.” 이것이 나의 시쓰기이다.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 사람의 냄새가 배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야말로 절경이다. 그래, 절경만이 우선 시가 된다. 시, 혹은 시를 쓴다는 것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결국 사람 구경일 것이다. ” 이것이 시, 시쓰기에 대한 나의 생각이다.
* 건강과 같다 / 문정희
시가 무엇인가 묻지 말라. 시란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 힘든 속성을 지닌 예술이다. 시에 대한 정의는 언제나 완벽한 정의가 아니기 쉽다. 그러므로 오늘은 시인에게 있어 시는 건강과 같다고 말해 둔다. 건강진단서가 지금 당신은 아무 병이 없다고 해도 만약 시인이 시를 쓰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불건강이요, 아프고 병든 생명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토끼와 구름, 하늘 높이 띄우기 / 신현정
ㅡ졸시 '토끼에게로의 추억'으로 시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토끼에게서는 달의 향기가 난다// 분홍눈은 단추 같다//앞이빨이 착하게 났다//
토끼의 두 귀를 꼬옥 쥐어봤으면 했다// 몽실했다//
두 귀를 잡고 공중으로 들었다가 내렸다도 해 보았다//
토끼와 시이소를 타고 싶었다// 그러면 토끼는 올라가고 나는 내려오겠지//
토끼는 구름이 되겠지// 아하함 이참에 토끼와 줄행랑이나 놓을까.”
토끼를 기화 혹은 발화, 부유의 동력인 구름으로 띄워보았다. 어쨌거나 지상에서 너무 높다랗게 띄웠음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또 다소 몽상적이기도 해서 누가 이 시대에 달이나 바라보는 퇴행의 뒷모습을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니요 한다 해도 할 말이 없다. 염치불구하고 한 번쯤 극단의 절반만이라도 멋진 고공 비행을 해보자는 계산을 깔고 선택한 것이 토끼와 구름이었다. 당분간은 이런 결벽증에 가까운 개결미의 순진한 놀이를 즐기기로 한다. 어디까지나 존재 자체를 헐겁게 느슨하게 페이소스하고 싶었던 것인만큼 부디 용서해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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