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란 무엇인가? 5
* 극점의 언어 / 이승하
종이라는 평면에 적히지만 시이기에 입체적인 언어가 된다. 시는 공간을 만들고 우주를 만든다. 시간을 늘이기도 하고 줄이기도 한다. 시는 일상어를 확장시키고 굴절시킨다. 때로는 일상어를 부정하고 배신하기까지 하면서 탈세상을 꿈꾼다. 때로는 언어로써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무모한 시도도 한다. 애매성과 구체성, 은유와 환유, 기법과 정신, 환상과 현실, 형이상학과 형이하학……. 그 틈바구니에서 시인은 아파한다.
그래서 시는 극점의 언어, 극한의 언어이다. 8000미터급 고산의 정상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피치를 올리는 그 집념으로 쓰는 것이다. 최후진술을 한다는 각오로, 유언을 남긴다는 각오로 오늘도 나는 또 한 편의 실패작을 쓰고 있을 뿐이다.
* 시는 없다 / 이승훈
시가 있는 게 아니라 시론이 있고 시론은 해석이고 해석은 역사의 산물이다. 역사를 초월하는 절대적인 해석은 없고 해석은 언제나 역사에 종속된다. 그러므로 시의 본질은 없고 절대적 가치도 없고 시라고 명명하는 목소리, 시라고 정의하는 제도가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아직도 무슨 시의 본질이니 가치니 진리니 하며 폼을 잡는 시인들, 평론가들, 이론가들을 보면 한심할 뿐이다. 요컨대 시는 없고 시론이 있지만 시론은 역사가 생산한다. 우리가 쓰는 시는 근대의 산물이고 근대 이전엔 이런 이상한 글쓰기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탈근대 혹은 후기 현대에 살고 이런 시대엔 미적 자율성, 시적 언어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이른바 근대 시론이 맥을 못 추고 시와 비시의 경계도 모호하고 도대체 시를 평가할 기준이 없다. 그러나 이런 기준의 부재, 결핍, 무가 자유와 통하고 새로운 가능성과 통한다. 현대시의 역사는 끝나고 현대 시론도 끝났다. 남은 건 시에 대한 자의식이다. 이제 시론은 철학이고 시쓰기는 시에 대한 방법론적 회의, 자기 성찰, 자기 비판이다. 내가 본질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것은 이런 사정을 동기로 한다. 시와 비시의 경계가 모호한 시대에 시를 고집하는 것은 폭력이고 우리 시단엔 이런 의미로서의 조폭들이 너무 많다.
* 내가 자작나무를 범한 이유 / 이재무
체제 검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기 검열이다. 문학은 금기와의 싸움이다. 상상력의 영토는 무한대로 보장되어야 한다. 시는 결코 도덕, 종교, 철학, 이념이 아니다. 그것들은 다만 텍스트 내에 파편적으로 편재할 뿐이다. 또, 문학(시)은 사실의 재현이 아니라 진실의 구현이다. 이를 위해 현실 경험을 굴절 왜곡 축소 과장할 줄 알아야 한다.
언어 예술인 시는 언어를 통해 미적 쾌감과 울림을 안겨주어야 한다. 언어에 대한 민감한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 시의 성감대는 사물과 현상 그리고 인간의 삶에 그 예민한 촉수를 들이밀 줄 알아야 한다. 시인은 그들 앞에서 자주 발기하는 자이다. 발기 불능은 시의 영감을 불러올 수 없다. 작년 여름 백두산 기행길에 자작나무를 범한[樹姦] 이유도 그 때문이다.
* 부재의 씨앗이 자라서 맺은 열매 / 장석주
모든 시들은 부재의 숲에서 싹을 틔우는 어린 나무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에 부재의 존재였고, 죽은 뒤에 다시 부재의 존재로 돌아간다. 문자들은 이 존재와 부재의 간극 사이를 불어가는 바람이다. 뭔가를 쓰는 자들은 이 부재의 권태를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채집망을 휘둘러 바람을 붙잡는다. 어리석은 몸짓, 아무 보상도 없는 몸짓들. 그러나 부재의 씨앗들은 여기저기에 흩뿌려져서 마침내 싹을 틔운다. 누구나 무의식에 그 어린 나무가 자란다.
ㅡ부재의 씨앗이 자라나서 맺은 열매가 바로 시다.
쓰는 행위 안에서 쓰기와 지우기는 반복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쓰면서 동시에 뭔가를 지워가는 행위다. 쓴다는 행위는 쓰지 않는 것들, 끝내 억압되어 무의식의 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것들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씌어지면서 표출되는 것들의 아래로 숨는다.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워지는 것이다. 모든 씌어지지 않은 것들은 삭제된 흔적, 공백으로 남는데, 실은 우리 욕망과 검열기제들에 의해 강제로 지워진 결과다.
* 백로와 트랙터와 시 / 장인수
웃음 창고에서 나오는 시, 눈물 양념을 버무린 해학의 시를 쓰고 싶다. 실핏줄도 심장도 미토콘드리아도 웃는 시를 쓰고 싶다. 웃음 비타민, 웃음 에너지가 풍부한 시를 쓰고 싶다.
나만의 친환경 웃음 새싹을 틔우고 싶다. 장인수만의 웃음 성분? 뭘까? 넉살 좋고, 비위가 노래기 회 쳐 먹을 정도의 능청? 언어유희? 음, 나는 인생의 2/3를 도시에서 살고 있지만 동시에 촌놈이다. 동시에 반인반수다.
순박하지만 음흉하고, 넉살 좋은 말재간을 갖추었지만 본능적으로 맹금류의 성품도 있다. 웃음보가 남달리 크고 깊은 존재이면서 사나운 이빨도 갖추었다. 트랙터를 닮았다고나 할까. 요즘은 농부보다는 트랙터가 훨씬 멋들어지게 농사를 잘 짓는다. 트랙터의 바퀴는 덤프트럭의 바퀴보다 네 배 정도 크다. 힘도 훨씬 더 세다. 그런데 트랙터 뒤에는 수십 마리의 백로들이 학춤을 추며 따라다닌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무지막지하게 생겨먹은 천하장사 괴물이면서 백로와 함께 논바닥에서 춤을 추는 트랙터를 닮은 시를 쓰겠노라고.
시는 나다 / 정일근
나는 시를 독학한 시인이다. 손을 내밀 학연도 선린善隣도 없었다. 누구도 시가 무엇인지를 어떻게 빚는지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 시가 나의 열망이었기에 스스로 시 쓰는 법을 익혔다. 몇 권의 시집이 나의 스승이었으며 내가 내 시의 열렬한 애독자였다. 내가 쓴 시는 나를 만족하지 못하면 시로 행사할 수 없었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다.
시는 내 속으로 들어와 나를 설득시켰다. 나는 시에 무지하였다. 이론서도 번역서도 읽지 못했다. 그래서 내 시도 무지하였다. 거들먹거리고 어렵고 요란하고 난해한 시는 나를 설득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나는 논論을 모르기에 논論이 없다. 나의 시안詩眼은 선악善惡과 미추美醜를 바르게 보는 것. 나를 설득했다면 나를 감동시킬 수도 있을 것이라 믿었기에, 나에게 시는 나다. 나 이상도 나 이하도 아니다.
* 시는 몸이며 생성이다 / 정진규
시는 생성生成이다. 요즈음 시는 내게 어제 심은 작약 다섯 그루이며, 담장 밖 낮은 언덕에서 녹음이 한창인 석가헌夕佳軒 늙은 느티나무의 모년봉청춘暮年逢靑春이다. 그가 비워둔 그의 허공으로 우리 집 뜨락을 기웃대는 아득한 한낮이다. 그의 음예陰?가 진종일 걸려 쓴 문자다. 지식과 경험의 늙은 역사가 질서라는 이름으로 간섭하는 것을 그는 거북해할 때가 많다. 제왕절개보다는 자연분만을 절대의 생명 행위로 그는 체화體化하고 있다. 시는 몸이다.
가령, 보리타작 끝낸 까끄래기를 태우는 저녁연기와 그 너머 뒷산에서 허드레로 건너오는 뻐꾸기 울음이(박용래) 다른 것이 아니라 한 몸이라고 처음부터 감응하고 있는 통로가 그에게는 있다. 어떻게 한 몸인가.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내게 있어 지금 그 순간은 <‘저물다’의 실물고지實物告知요 슬픈 안식>으로 응답하고 있다. 허드레로 우는 뻐꾸기와 저녁연기는 그래서 한 몸이다. 하나는 소리로 다른 하나는 시각으로 서로 감창感愴하고 있다. 시는 몸이며 생성이다. 그것에 대한 절대적인 동의다.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꿈속에서조차 꿈을 꾸는 마침내 이르고자 하는 몸 밖의 몸이다>그 생체生體다. 감창의 소산이다. 그러나 정답이라고 단답을 낼 수는 없다. 그렇다고 둘도 아니다. 추사秋史 선생 말씀대로 불이선란不二禪蘭으로 태어나는 하나의 몸이다. 수식瘦式의 소산이다.
* 심득心得된 말 / 조정권
사유 앞에 언어를 다 드러내는 것은 시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시를 쓰기 전에 나는 마치 벼랑 끝까지 내몰린 심정을 유지하려 애쓴다. 절벽 앞에 던져진 어떤 메시지를 뛰어 내려가 붙잡을 수도 없고 동시에 서 있을 수도 없는 마음의 상태가 며칠씩 지속되거나 혹은 젖은 성냥처럼 잘 지펴지지 않기도 한다. 나는 지속되는 마음의 상태에 성냥을 긋고 한 줄의 불을 일으킨다.
나는 언어를 사유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언어는 시인의 체질을 드러낸다. 내게 언어란 사유 이전이거나 사유 이후에 발생되는 ‘심득心得된 말’이다. 시의 첫 구절 혹은 한 문장은 반드시 이 심득이라는 과정을 통과하도록 한다. 나는 땡볕과 같은 언어를 직접 쐬지 않는다. 땡볕이 창호지를 통과해 유순해지듯 그렇게 나는 언어를 ‘심득된 세계’로 조련하려 애쓴다.
*돌 틈을 파고드는 나무 쐐기처럼 / 채호기
시란 언어적 구성물이다. 동시에 시란 언제나 언어 그 너머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알다시피 시의 이러한 특성은 언어의 본질적 성격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초점은 언어와 실재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고, ‘언어의 질서’와 ‘ 언어로 표현될 세계의 질서’는 항상 서로 어긋난다는 점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에서 시의 힘과 아름다움이 발생하지만 모든 시창작의 난제 또한 이곳에서 생겨난다.
시를 쓸 때 시인은 언어의 질서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지 않고는 언어의 작동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의 질서를 버리고도 시에 도달하는 일, 그 지난한 실현은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몸의 질서, 즉 의식이나 가슴이 아닌 몸의 반사 운동과 맞닿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에서 언어의 질서를 넘어서는 언어의 완성은 전면적이지 않고, 돌 틈을 파고드는 나무 쐐기처럼 부분적으로 이루어지며, 언어의 바깥인 실재에서 오지 않고 언어 내부에서 이루어진다.
* 시는 내 삶의 단독정부 / 천양희
“나더러 시詩를 설명하라고? 그건 안돼.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이야.” 시인 네루다가 한 말이다. 나더러 시란 무엇인가 정의를 내리라고? 그건 안돼.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무서운 일이야. 나두 네루다처럼 말해본다. 시란 무엇이다, 라고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것이 시라면 나에게 시란 무엇인가, 라고 바꿔 말해보면 어떨까. 나에게 시는 절망이 부양한 내 목숨에 대한 반성문이다. 그래선지 내 삶에서 시는 단독정부의 수반처럼 무서운 권력을 쥐고 있다. 그 권력은 살아 있는 자로서 나를 늘 질문자의 위치에 서게 하고 각성자의 위치에 서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시의 큰 힘이다.
한 편의 시는 한 세계와 같다는 말은 얼마나 무궁무진한 시의 힘인가.
그 힘으로 시인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 때 시는 내 자작自作나무이며 내 전집全集이다.
* 아무 쓸모 없음의 쓸모 있음 / 최영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무방한 것이었으나 말하고 싶어 쉴새없이 몸이 들썩였던 것. 무슨 대단한 비의를 품은 듯, 천기를 누설하는 착각에 빠지게도 했던 것. 굳이 쓰려고 하지 않았으나 자기 안의 다른 무엇이 써버리고 말았던 것. 써놓은 것이라도 얼른 감추고 폐기처분해야 했으나 그만 깜박 발설해 버린 것. 지면을 어지럽히고 종이를 낭비하고 독자의 시간과 감정을 빼앗은 것. 아무 쓸모없는 짓거리였으나 그러므로 더욱 쓸모 있는 것이라 자위하고 의미를 달아준 것. 나 자신이라도 구제해볼 요량으로 시작하였으나 점점 온 세계를 구제하려는 과대망상에 빠졌던 것. 잘해야 허무맹랑한 허무를 덮는 위안거리나 되었을 것. 그 바람에 다른 유용한 것들을 다 놓쳐버린 것. 눈앞에 늘린 수백의 유용을 자진반납하고 단 하나의 무용을 거머쥔 것. 더 잃을 것도 없는 적빈의 열매, 혼자 궁글려보다 허공에 훅 날려버려도 좋을 것. 아무 쓸모없음의 모든 쓸모 있음.
* 나의 2백자 시론 / 허만하
시는 다른 방법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언어실천이다.
시를 발견함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다른 짐승과 구별되었다.
시는 자기에 대한 논의를 한발 앞서 있는 언제나 미래이어야 한다.
시는 전달을 바라면서도 대중성을 경멸하는 아름다운 양면성이다.
시는 지속적으로 상투성과 싸움으로써 정신의 싱싱함을 살려내는 미량의 독이다.
시는 그 자신의 코드를 가진다. 시는 평균치의 길을 버리고 택한 편차의 길이다.
시는 마이크를 잡지 않는다.
시는 시 이외의 다른 가치(정치 권력 또는 유사 이데올로기)의 앞잡이가 되기를
자각적으로 거부하는 자존의 절벽이다.
* 시를 쓰므로, 나는 있다 / 허영자
시는 나에게 있어 자기 존재의 확인이며 자기 정화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나라는 존재가 무엇이며 내가 어디에 어떻게 있는가를 알려주는 것이 내가 쓰는 시인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쓰는 시를 통하여 나는 내가 있으며, 또한 어떠한 모습으로 있는가를 스스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시를 통하여 나는 자기의 온갖 부끄러움을 지울 수가 있다. 나의 추함, 비겁함, 거짓…… 등등이 저지르는 악행과 악덕을 씻어내는 행위가 시이다.
하기에 시 앞에서 나는 항시 참회의 마음이며 정직한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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