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雲의 배움터/漢詩 1

「충주석」 백낙천의 작품을 본떠서 짓다. - 권필

花雲(화운) 2018. 1. 12. 19:45


「충주석」 백낙천의 작품을 본떠서 짓다- 권필

忠州石 效白樂天(효백락천)



忠州美石如琉璃 (충주미석여유리)   충주의 좋은 돌은 유리 같아서

千人劚出萬牛移 (천인촉출만우이)   천 사람이깍아내고 만 마리 소가 옮긴다.

爲問移石向何處 (위문이석향하처)   돌 옮겨서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去作勢家神道碑 (거작세가신도비)   가서 권세가의 신도비를 만든단다.

神道之碑誰所銘 (신도지비수소명)   신도비에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냐고 하니

筆力倔强文法奇 (필력굴강문법기)   필력은 굳세고 문장 작법이 뛰어난 사람이란다.

皆言此公在世日 (개언차공재세일)   다들 말한다. "이 분이 살아계실 때

天姿學業超等夷 (천자학업초등이)   청성과 학업이 동년배들을 뛰어넘었고 

事君忠且直 (사군충차직)   임금을 섬길 땐 충성스럽고 정직했으며

居家孝且慈 (거가효차자)   집안에선 효성스럽고 자애로웠다.

門前絶賄賂 (문전절회뢰)   문 앞에는 뇌물써서 청탁하는 사람이 없었고

庫裏無財資 (고리무재자)   창고 안에는 쌓아둔 재물도 없었다.

言能爲世法 (언능위세법)   그분의 말씀은 세상의 본보기가 될 만했고

行足爲人師 (행족위인사)   행실은 남의 스승이 되고도 남았다.

平生進退間 (평생진퇴간)   평생 벼슬하거나 물러가는 사이에

無一不合宜 (무일불합의)   도리에 안 맞는 것 하나도 없었다.

所以垂顯刻 (소이수현각)   때문에 이 내용 새겨 후세에 전해

永永無磷緇 (영영무린치)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此語信不信(차어신불신)   이 말을 믿을 만한지 아닌지

他人知不知 (타인지부지)   남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遂令忠州山上石 (수령충주산상석)   마침내 충주 산 위의 돌들은

日銷月鑠今無遺 (일소월삭금무유)   날로 달로 사라져 이제는 남은 게 없구나. 

天生頑物幸無口 (천생완물행무구)   하늘이 돌을 낼 때 입 없도록 한 게 다행이지

四石有口應有辭 (사석유구응유사)   돌에 입이 있다면 분명 할 말이 있으리라.


權韠 (1569~1612)

- 石州 권필은 사대부 집안의 자제이며 松江 鄭澈(정철)의 제자이기도 하다.

- 19세 때 초시·북시에 연달아 장원급제한 인재였다. 그런데 그가 쓴 답안지 내용에

   조정의 뜻에 어긋나는 내용이 있다는 이유로 합격이 취소되었다.

- 권필은 심기일전하기 위해 전국 각지를 여행하는데 이 과정에서 백성의 삶을 목격하게

   되었다.

- 권필은 이 여행을 통해 사회 비판의식을 키웠고, 이를 훌륭한 시로 표현했다.

- 44세 때 「宮柳詩(궁류시)」를 써서 광해군위 외척세력을 풍자하고 비판했다. 이 작품

   때문에 광해군의 친국을 받는 과정에서 혹독한 내질을 당해 그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작품해설

- 이 시는 당나라 시인 白居易(백거이)의 「靑石」이라는 작품의 내용을 본떠서 썼다.

- '神道碑' : '신도'는 '신의 길'이라는 뜻이다. 신도비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다니는 길에

   세운 비석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왕이나 덕망 높은 벼슬아치, 학자들의 무덤에

   신도비를 세운다.

- 신도비의 내용은 諛墓(유묘)에 가까울 정도로 고인에 대한 칭송 일색이다. 후손들은

   이런 식으로 조상을 미화하여 집안 자랑을 한다. 이 시의 7구에서 18구에 나오는 내용은

   바로 이런 점을 풍자한 것이다.

- 천 사람이깎아내고 만 마리 소가옮기니 충주 산 위의 돌들은 날로 사라져 이제는 남은

   것이 없게 된다.

- 권필은 이 작품을 통해 권세가들의 허세와 가식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그들이

   부끄러움을 느껴주길 바랐다.

- '하늘이 돌을 낼 때 입 없도록 한 게 다행이지, 돌에 입이 있다면 분명 할 말이 있으리라.'

   돌에 입이 있었다면 무어라 말했을까.



「한시에 마음을 베이다 」  김재욱 지음. 世·七

  왕의 서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