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강 / 임 보
고개를 넘으면 강이 있었다
정초正初면
강은 항상 은빛 얼음 속에 잠들어 있었다
우리가 떠나는 날은 으레 눈이 오셨다
조부祖父의 명주 두루마기보다
부드럽고 흰 눈이
내 왕골 꽃신을 적시며 내렸다
강을 거슬러 40리
예닐곱 내 유년의 하례賀禮 길은
무거운 순례巡禮였다
정오가 지나면
조부의 고희古稀 푸른 수염에
나의 무명 대님 끝에 고드름이 열렸다
인가도 없는 외딴 강가에
주막이 하나 있었다
조부가 한 잔의 청주로 목을 덮일 때 나는 화롯가에서
마른 은어銀魚 안주를 씹었다
40리 강은
내 유년의 좁은 걸음으로 쉽게 재지지 않았다
해가 한참 기운 뒤 열녀문이 보여야만
우리들의 외롭고 더딘 행군은 끝이 났다
곡천曲川강이 구부러진 언덕 위에
대나무 숲 그 속에 눈을 인 초가 지붕들이
고막 껍질처럼 누워 있었다
조부가 태어난 마을
이가 하나도 없는 증조모曾祖母님은
으레 우리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종일 봉창 문을 열어 놓으셨다
[‘현대문학’ 1962년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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