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추위/ 曉井 강연옥
바람의 매를 맞은 적 있다
바닥을 쳐 본 사람은 추워도 두렵지 않다
찬 손길에서 햇내가 나기 때문이다
오늘 아니라도 반드시 배달될 물건이라는 걸 안다
나무가 기대고 서 있는 허공에 숙성된 겨울이 새로운 자리 배정을 하고 있다
무채색의 지진이 배멀미처럼 일어난다
좁은 골목으로 상기된 아침이 속속 도착하고
새들은 앉았던 나무마다 짹짹대며 명랑한 문패를 달고 날아간다
산수유, 매화, 벚꽃, 개나리……
신의 계획표에 맞춰진 일들이 진행되는 소리 시끄럽다
오차 없는 태초의 비밀이 폭발한다
땅이 긴장하며 숨을 몰아쉬는 순간마다
지난해 잠든 목숨들이 푸른 노래처럼 돋고
가늘고 넓적한 음색이 뒤엉켜 근육을 키운다
단 한 번 다녀가는 길에서 주저 없이 일어서는 땅땅한 의지가
또 한 번 파랗게 흔들린다
뿌리가 장딴지에 힘을 준다
매화 핀다
꽃 피는 매화나무 아래 서면
우듬지까지 비린 꿈이 파랗고
푸른 맥박소리 쿵쿵 들린다
몇 살인지
얼굴을 성형한 중년의 목주름 같은 연륜이
투덥투덥 붙은 몸으로도
늘 열여덟 살인 척
피지 못하는 것은 죽은 거라고
애 밸 일 없어도 가슴 뛰며 살라고
눈꼬리 삼삼히 치켜뜬 여자가
바람을 타고 앉아 몸을 흔든다
꽂히면 상처가 되는
각이 산 말 수북한 땅에서
추운 강 건너느라 꽁꽁 여민 옷
곱은 손 비벼 단추 푼 자리마다
모서리 없는 향기 풀풀 날고
쇠구슬 같은 살 하들하들 눈부시다
지금까지 내 입술이 함부로 피운 꽃은
흰색일까!
깜깜일까!
까치집
까치 한 마리 저녁 하늘에 선을 긋는다
한 생이라고 똥끝 타는 날갯짓이다
천지가 길이지만 꽝꽝 막힌 벽 앞에서
포기라는 중얼거림을
찬밥 같은 울음으로 뚫어내던 순간 있었다
비가 쉬었다 가고 바람이 뒤를 보고 가는 지붕 없는 집
따뜻한 마음들 오보록이 살아서
꿈틀꿈틀 더운 김 오르는 밥상에
숟가락 젓가락 공손히 놓이는 소리 나면
비틀대는 골목 지나 푸득푸득 가고 싶다
은행나무 우듬지 길의 문패 없는 성근 쪽방
밤이면 별을 세는 아이들의 꿈이 뚱뚱해지고
아슬아슬 탈선이 나비잠에 들기도 하는 곳
신풍역
모텔방처럼 검은 커튼이 쳐진 신풍역 지하
늘씬한 여자가 맨몸으로 누워 있다
형광판에 빨간 불이 켜지고 잠시 후면 당 역에 도착한다는
언제나 발끝부터 짚어오는 남자가 화면에서 조금씩 움직인다
생의 중심은 단 한 곳이라는 듯
먹잇감을 발견한 솔개처럼 시선을 사타구니에 꽂은 채 레일을 덮치는
정상위 자세만 고집하는 변강쇠다
쭉 곧은 다리를 가진 그녀는 바람에 실려오는 볼트의 공명만으로도 너트의 나른함을 느낀다
무엇이나 길드는 것은 반항을 모르고
즐거운 본능이 선택한 짧은 소리들이 달팽이관에 씹히자 휘청 어지럽다
조용한 역사에 사정이 시작되고 있다
숨넘어갈 듯 외마디와 함께 문이 열린다
쏟아지는 정충들이 하루치의 생을 완성하려 시간의 휴지에 닦인 채
강물 속으로 와글와글 잠수한다
걱정스런 역무원이 머리맡을 손전등으로 비추자
어둠은 이불을 덮다 멈추고
맞물린 자세에서만 완전한 오르가즘은 느껴지는지 궁합이 박제된 꿩 같다
시간은 한 곳에 머물지 못해 문을 열었다 닫았다 안달을 하며 떠나고
도시 냄새가 날 것 같은 여자 하체에 불빛이 끈적거리다 숨이 멎는다
바람이 들고 오는 쇳소리 멀리서 흔들리면
화끈! 색에 물오를 신풍역은 다시 깜깜하다
권태 없이 즐길 연놈의 신방으로
키 작은 꽃을 가꾸는 이들의 꿈이 덩굴을 뻗어온다
여정
나비가 박새나 곤줄박이처럼 휘익 날아가지 않고
팔랑거리며 삐뚤빼뚤 날아가는 건
꽃과 꽃 사이에 난 길이
낮은 담장에 호박 덩굴 얹은 사람들
민들레처럼 모여 사는 동네
좁은 골목길을 닮아서다
그늘의 키 채송화 같아서 마음 문 닫히는 법 없고
틈틈이 계절이 피어 영그는 바람 불면
멀리 와버린 이별이 문득 그립기도 한
먼 별들의 나고 죽는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긴 길이라서다
내 발자국도 돌아보면
구불구불 처음 배우는 글씨처럼 직선인 것 없다
소나기 피해 접어들던 축축한 처마라든가
들여다보면 움푹 아픈
돌부리에 채여 넘어진 자리
마주보던 얼굴 가물가물 잊어 주는 보시까지
풀 같은 들꽃 같은 향기들이다
앵두꽃 피면
앵두꽃 보글보글 피면
이만 하얀 고 계집애
깜부기 같은 얼굴이 생각나
먹을 거 궁하던 시절
같이 놀자 부르면
썩은 곳 대충 도려내고 찐 고구마
양손에 들고 뛰어 나올 때
땟국물 뚝뚝 묻은 티가 작아서
괜히 내 얼굴이 먼저 빨개졌지
눈에 확 띄던
앵두만한 젖꼭지
꽃 피고 지고 몇 번이었을까
이젠 브래지어 속에 스펀지까지 넣고
가슴을 쭉 내밀며 다니는데
어린 노트에 써 논 친구 이름은 까망까망 눈 뜨고 웃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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