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찬(素饌)/ 박목월(1916~1978)
오늘 나의 밥상에는
냉이국 한 그릇.
풋나물무침에
신태(新苔).
미나리김치.
투박한 보시기에 끓는 장찌개.
실보다 가는 목숨이 타고난 복록(福祿)을.
가난한 자의 성찬(盛饌)을.
묵도(默禱)를 드리고
젖가락을 잡으니
혀에 그득한
자연의 쓰고도 향긋한 것이여.
경건한 봄의 말씀의 맛이여.
* 새로 노는 계절은 고대하던 손님과 같아서 마당도 쓸어야 할 것 같고 동네 길목의
묵은 먼지들도 선행(善行)의 가식을 무릎쓰고라도 치우고 싶다. 봄맞이 창문을
닦으며 가슴 속 깊은데서부터 피어오르는 한 표정을 본다. 내 가진 가장 좋은 얼굴이
나오고, 그 위에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 나오고,그 위에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 얹히고,
그 위에 미나리의 빛깔과 냉이의 맛이 스민 표정, 아, 겨울은 얼마나 춥고 힘겨웠던가.
이제 다시 살아보라고 햇살과 바람은 소곤거린다.
새봄 아침의 소찬, '웰빙'이라던다? 하는 천박한 포장이 덮어버리고만 가난과 겸손과
'말씀'으로까지 이어지는 이 명징한 밥상. 밥상이 '그분의 말씀'인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
말씀을 아무렇게나 버리는 시대여. 너무 큰 밥상 앞에서 가책을 느끼지 않는 자, 희망이
없으리.
<장석남. 시인. 한양여대 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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