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차(茶)/ 김현승(1913~1975)
가을은
술보다
차 끓이기 좋은 시절......
갈가마귀 울음에
산들 여위어가고
씀바귀 마른 잎에
바람이 자나는
남쪽 십일월의 긴긴 밤을,
차 끓이며
끓이며
와로움도 향기인 양 마음에 젖는다
갈가마귀 울음소리고 보아 겨울 문턱이다. 스산한 울음소리 속에 아직 당도하지 않은 북방의 날 선 바람과 곧 들이닥칠 눈보라의 매서운 기운이 서려 있다. 이를 예감한 산들이 여위고 있는 것이다. 산들이 여윈다는 한 구절 속에서 11이라는 숫저처럼 수척해진 나무들, 그리고 그 나무들을 닮은 고독한 영혼을 더듬어볼 수 있다. 씀바귀 마른 잎을 더욱 바삭거리게 하는 바람이 남은 물기마저 다 소진시킬 듯 살갗을 훓고 지나간다.
이 쓸쓸한 시간 속에서 차를 끓이는 일아린 자칫 울적해지기 쉬운 마음을 우려 향이 배게하는 일이다. 찻물에 어린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그런 나를 한 모금씩 음미하면서 '외로움도 향기인 양' 긴긴 밤을 소슬하게 하는 일이다. (손택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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