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雲의 배움터/詩 창작론

혼을 실은 가락/임보

花雲(화운) 2010. 7. 12. 08:06


'혼을 실은 가락'

 - 독자를 위하여

 


시는 노래다.

시는 ‘진술되는 언어’가 아니라 ‘읊어지는 언어’다.

읊어진다는 것은 음악적인 가락에 실린다는 뜻이다.

진부한 얘기라고 생각지 말라.

언어가 가락을 안았을 때 가슴 속에 파고드는 마력

지닌다. 우리는 이미 다 아는 스토리의 소설

「심청가」를 들을 때 가슴이 더욱 뭉클함을 느낀다.

우리의 가슴을 찌르는 것은 ‘의미’에 앞서 ‘가락’이다.

현대시가 운율을 배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 것은

외형적 율격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자유스러워

지고 싶다는 의지이지 운율 자체에 대한 거부는 아니다.

그러기에 자유시에서도 내재율을 문제 삼지 않는가?

자유시도 내재율뿐만 아니라 율격과 압운 등의 외형률

얼마든지 포섭할 수 있다. 시에서의 운율의 관리는

시인의 역량에 속하는 문제이다. 운율은 시의 무기다.

 

시는 영혼의 노래다.

시가 지닌 메시지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시인의 ‘혼’

담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 가락에 실린 모든 글이

시일 수 없는 것이 바로 이러한 소치 때문이다.  

시 속에 담긴 시인의 ‘혼’은 바로 ‘시정신’인데 이는

사물에 대한 시인의 ‘성(誠)’이며 ‘도덕률(道德律)’이

바탕이 된다.

시인은 세계에 대한 개성적 도덕률을 지닌 자다.

그래서 시인은 장인(匠人)이 아니라 도인(道人)이다.

영원히 죽지 않을 영혼의 시를 원하는 자는 우선

‘시인’될 일이다.

시는 곧 그 ‘시인’이 낳은 영혼의 노래다.

말로는 이렇게 쉬우나 어찌 시인 되는 일이 그렇게

쉬울 것이며, 설령 얼마쯤 시인에 가까워졌다 손치더

라도 어찌 그의 노랫가락이 천만 사람의 가슴을 울릴

명창이 다 될 수 있겠는가?

 

나 역시 한 30년 시공부를 해 오지만 시의 길은 갈수록

멀고도 험하기만 하다. 더러 강한 가락(律)을 빌어,

아직 설익은 생각들을 조급하게 기워 세상에 드러내

보이지만 이 얼마나 어리석고 어리석은 부끄러운

일인가? ‘혼’이 담긴 시는 아직도 멀기만 하다.

 

1988년 가을 북한산 곁에서  林 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