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雲의 산책로/독서이야기

타인의 고통/ 수전 손택

花雲(화운) 2019. 1. 24. 10:52

타인의 고통/ 수전 손택

이재원 옳김. 도서출판 이후. 1998



차례

한국의 독자들에게

타인의 고통((Regarding the pain of others)

감사의 말

 부록

   1.문학은 자유이다

   2. 현실의 전투 공허한 은유

   3. 다같이 슬퍼하다,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4. 우리가 코소보에 와 있는 이유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개입할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가?

2003년 10월 12일, 독일출판협회는 제55회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적에서 수전 손택에게 평화상을 시상했다. "거짓 이미지와 뒤틀린 지닐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사상의 자유를 굳건히 수호해 왔다."는 것이 손택에게 평화상을 시상한 이유였다. 독일 출판협회가 잘 지적했듯이, 손택은 첫 저서『해석에 반대한다』(1996)에서 최근작 『강조해야 할 것』(2002)에 이르기까지 기계로 대량 복제되는 이미지가 한 문화의 감수성을 어떻게 바꿔놓는지 다양한 방식으로 일관되게 추적해 왔다. 그리고 그 작업은 현실 참여로 이어졌다.


손택의 현실 참여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 중이던 1996년무터 본격적으로 시작됬다. 당대의 유명 시사적 『파르티잔 리뷰』에 「지금 미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기고, "미국은 대량 학살 위에 세워졌다" "미국적 삶의 특성은 인간의 성장 가능성을 향한 모독이다" "백인은 역사의 암이다" 같은 숱한 곡설로 미국의 은폐된 역사, 베트난 전쟁의 허위, 아메리카 드림의 실상을 폭로했던 것이다.


주류 대중매테는 이 일을 계기로 손택의 별명을 '대중문화의 퍼스트 레이디'에서 '동시대 미국 문단의 악녀'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으나 그 뒤로도 손택은 자신의 실천을 멈추지 않았다. 가장 최근에는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라고 얘기하며 9·11사건 직푸 미국 사회에 불어닥친 반이성적 태도를 낲카롭게 비판하기도 했으며, 이라크 전쟁 당시에는 "사이비 전쟁을 위한 사이비 선전 포고"를 그만두라고 부시 행정부를 공격하는 등, 손택은 결코 논쟁을 피하는 법이 없었다.


『타인의 고통』은 25년 전에 발표된 『사진에 관하여』(1977)과 이어지는 저서이다. 전작이 사진 이미지를 분석하면서 사람들이 현대성이라는 상황을 이해하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했다면, 이번 저서는 이미지가 사용되는 방식과 그 의미는 물론이거니와 전쟁의 본성, 연민의 한계, 양심의 명령 등까지 살펴 보고 있다. 그래서 『타인의 고통』은 이라크 전쟁 전후의 현실정세에 대한 '지적' 개입이기도 하다.


손택의 관찰에 따르면, 사방팔방이 폭력이나 잔혹함을 보녀 주는 이미지들로 뒤덮인 현대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일종의 스펙터클로 소비해 버린다. 타인의 고통이 '하룻밤의 진부한 유흥거리'가 된다면, 사람들은 타인이 겪었던 것 같은 고통을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도 그 참상에 정통해지고, 진지해질 수 있는 가능성마저 비웃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손택은 이렇게 주장한다. 연민은 쉽사리 우리의 무능격함뿐만 아리나 우리의 무고함("우리가 저지른 일이 아니가")까지 증명해 주는 알리바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그러니까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극복하고, 잔혹한 이미지를 보고 가지게 된 두려움을 극복해 우리의 무감각함을 쩔쳐내야 한다고.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핌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메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고통을 둘러싼 도상학은 기나긴 족보를 갖고 있다. 흔히 재현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간주되는 고통은 신이나 인간의 분노가 넣은 것이라고 이해되는 고통이다. 특히 고통받는 육체기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으로서, 기독교 예술은 지옥의 묘사를 통해서 수세기 동인 이 두 가지 기본적인 욕망을 모두 충족시켰다.


숭고하거나 장엄하며, 그도 아니면 비극적잊 형태로 아름다움을 담고 있으니 유혈 낭자한 잔투 장면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주장은 예술가들이 제작한 전쟁의 이미지에 늘 따라붙는 주장이다. 현대가 시작될 무렵에는 원래 소름끼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을 사람들이 타고났다는 주장이 훨씬 더 쉽게 받아들여진다. 잔악함에 대한 사랑은 연민만큼이나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대중에게 공개된 사진들 가운데 심하게 손상된 육체가 담긴 사진들은 흔히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찍힌 사진들이다. 저널리즘의 이런 관행은 이국적인(다시 말해서 식민지의) 인종을 구경거리로 만들던 1백여 년 묵은 관행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비록 적이 아닐지라도 타자는 (백인들처럼) 보는 사람이 아니라 보여지는 사람 취금을 당한다.


사진 없는 전쟁, 즉 저 뛰어난 전쟁의 미학을 갖추지 않은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카메라와 총, 그러니까 피사체를 '쏘는' 카메라와 인간을 쏘는 총을 동일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행위는 곧 사진을 찍는 행위인 것이다.

      -표지 글 중에서


한국의 독자들에게

  현대의 삶이 지닌 주목할 만한 특장 가운데 하나는 전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끔직한 참사들을 (그 현장에서 벌리 벗어난 채 사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셀 수도 없이 많아졌다는 사실입니다. 잔혼한 행위를 보여주는 이미지들은 텔레비젼과 컴퓨터의 작은 화면을 거치면서부처 이제는 점점 더 뭔가 진부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시청자들은 잔인하게 묘사된 푝력에 익숙해지는 걸까요, 아니면 뭔가 다른 반을을 보이게 되는 걸까요? 매일깥이 쏟아지는 이런 이미지 때문에 시청자들의 현실 인식이 손상될까요? 그렇다면 저 말리 떨어져 있는 분쟁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염려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타인의 고통』을 쓰기 시작햇을 때 제가 갖고 있었던 궁금증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특히, 저는 1993년, 1994년, 그리고 1995년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보냈던 오랜 시간을 떠올려 봤습니다. 그때 사라예보 주민들은 자신들을 침력한 세르비아인들이 날이면 날마다 맹열히 쏟아 붓던 푝격과 포위 공격을 거의 3년 이상 견뎌내고 있었더랍니다. 저는 하루 하루가 공포의 나날이고 전쟁이 진부한 일상이던 곳에서 거주하며, 이런 경험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 이런 경험을 단지 이미리조만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쟁이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봤습니다.

  저는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전쟁을 실제로 이해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인상을 받았죠. 그렇지만 저는 우리, 그러니까 전쟁을 겪지 않아도 되고 안전하게 살아 왔던 사람들이 오늘날의 미디어 전문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저 전 세게적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타인의 고통』은 사진 이미지를 다룬 책이라기보다는 전쟁을 다룬 책입니다. 제게 있어서 이 책은 스펙터클이 아닌 실제의 세계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논증입니다. 저는 이 책의 도움을 받아서 사람들이 이미지의 용도와 의미뿐만아니라 전쟁의 본성, 연민의 한계, 그리고 양심의 명련까지 훨씬 더 진실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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