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로이 취해서 온갖 시름 잊어야지 - 양촌 권근
<睡起,수기>
白日偸閑入睡鄕 (백일투한입수향) 대낮에 틈을 내어 잠의 세상에 들어가니
邯鄲世事又奔忙 (한단세사우분망) 한단침(邯鄲枕)의 세상 일 또다시 바쁘구나.
不如花下傾春酒 (불여화하경춘주) 차라리 꽃 아래서 봄에 익은 술 기울이며
醉裏悠然萬慮忘 (취리유연만려망) 한가로이 취해서 온ㅈ갖 시름 잊어야지.
陽村 權近 (1352~1409)
- 조선
- 이색의 문인으로 고려 말기에 명나라에 대한 외교문제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유배를
당해 있는 중에 조선 왕조가 개국되자 풀려나 조선 왕조에서 다시 벼슬하였다.
- 조선 초기 명나라에 대한 왜교를 수행한 공이 클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성리학의
이론적 정립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 왕조가 바뀌는 변동기를 살았던 지식인으로서 껶게 되는 불운한 상황속에서 그의
처신을 비난하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았을 것이다. 이런 처지에서 그의 심경도 마음
속으로 끊임없이 시달림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작품해설
- 이 시는 권근이 낮잠을 자다가 일어나 지었다고 한다.
- 첫째 구절과 둘째 구절에서는 낮잠을 자면서도 꿈자리가 편안하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한단침'의 옛 이야기처럼 꿈속에서도 또 한바탕의 복잡한 세상 일에 바쁘게
얽혀들고 말았다고 탄식한다.
- '한단침'의 이야기: 당나라 때 노생이란 사람이 한단의 객사에서 도사를 만나 자신의
신세 한탄을 하니, 도사가 베개 하나를 주기에 조행이 이 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다.
노생은 꿈속에서 미인을 만나 장가들어 여러 자녀를 낳았으며 과거에 급제하여 재상에
올랐다가 80세가 넘어서 죽었다. 그 꿈을 꾸는 동안은 객사 주인이 기장을 찌기 시작
해서 아직 익지도 않은 잠깐 사이라는 것이다.
- 온갖 시비가 뒤섞여 소란한 일상에 지쳐 잠이 들었는데도 꿈길조차 편안하지 못하여
자신의 마음을 풀어놓을 수 있는 자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 조선 왕조에 들어와 정치적 외교적으로도 중요한 역학을 담당하였고, 학문적으로도
조선 성리학의 체계를 정립하여 그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비의 표적이 되어 얼마나 깊은 번민 속에 괴로워했는지를
이 시의 짧은 몇 구절에서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 셋째 구절과 넷째 구절은 번민으로부터 도피하는 길을 술에서 찾고 있다. 술에 취해
세상만사와 모든 근심을 잊고 한가로이 봄날을 즐겨보자는 것이다. 낮잠을 자도
시름을 잊고 편히 쉬지를 못하니, 술에 취해 시름을 잊어보자는 것이다.
- 한 새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머릿곳에 있는 가치관이 자신의 처신을
정당화시켜 주지 못할 때 가슴속에서 들끓는 번민과 갈등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절절하게 느껴진다.
- 혁명체제의 정당성을 정면으로 내세우면서 뻔뻔하게 자신을 정당화시키지 못하고,
좌우를 돌아보며 번민하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모습을 보면서 그 지적 정직성에
깊은 연민의 정을 느낄 수 있다.
「詩境 : 漢詩와 道」, 금장태, 한국 한시의 세계
박문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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