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의 문신이요, 국문학상 대표적인 시조시인으로 일컫는
윤선도(1587~1671)선생의 유적지. 선생의 자는 약이 호는 고산 또는 해옹이다.
광해 4년(1612)에 진사가 되고, 4년 후 성균관 유생으로서
권신의 횡포를 지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경원에 유배되었다.
광해 15년에 인조반정이 일자 석방되어 의금부도사에 취임하였으나 곧 사직하고 이곳 향리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인조 6년(1628) 별시문과의 초시에 장원한 휴봉림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고
한성서윤과 예조정랑을 역임하는 등 수차에 걸쳐 나라에 중용되었다.
병자호란 후, 주로 완도의 보길도와 해남의 수정동 및 금쇄동에 은거, 자연에 들어 원림을 경영하고
산중신곡과 어부사시사 등 불후의 명작을 이루어 조경문화와 국문학의 발전에 큰 공을 남겼다.
그 사이 효종의 부름으로 벼슬에도 나아갔으나 당쟁으로 다시 유배당하는 등 파란을 겪다가
현종 12년(1671)에 85세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숙종 원년에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를 충헌이라 하였다.
녹우당
보수공사를 하고 있어 개방하지 않아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녹우당 안채에는 윤씨 후손들이 실제 거주하고 있다 한다.
녹우당 건물 앞에 500여년된 은행나무
이곳에 최초 터를 잡은 윤효정이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비가 오면 은행나무 잎이 비처럼 떨어진다 해서 사랑채 이름을 녹우당이라 지었다는 말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