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우당 문익점선생 영정 - 선생은 고려 충혜왕 원년 1331년 2월 2일 단성현 배양리
지금의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서 문숙선(文叔宣)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字)는 일신(日新) 호는 삼우당(三憂堂)인데, 그 의미는 항상 국가의 어려움을 걱정하고,
성리학이 보급되지 않음을 걱정하며, 자신의 도가 부족함을 걱정한다는 것으로
선생이 직접 지은 호이다. 12세에 이곡(李穀)선생의 문하에서 수학, 23세에 목은 이색(李穡)선생과 함께
정동향시에 합격하고, 30세에 포은 정몽주(鄭夢周)선생과 함께 신경동당에 급제하였다. 그 후 벼슬이
여러 차례 올라 38세에 좌정언으로 있을 때인 1363년(공민왕 12년) 서장관의 자격으로 원나라에 사신의
일행으로 갔다가 돌아오면서 목면종자를 붓두껍 속에 넣어와 시험재배하여 전국에 전파시키니 의류혁신과
국가 경제 발전에 큰 획을 그었다.
60세에 종2품 경연동지사에 임명되었으나 공양왕에게 사직의 운영에 필요한 [시무8조]를 올리고 영원히
관직을 떠났다. 1392년 섬기던 고려가 망하자 조선조의 여러차례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도 두문불출하시다 70세인 1400년 2월8일, 함박눈이 목화송이처럼 펄펄 내리던 날 돌아가시니 5월에 예장으로 장례하였다.
사후에 태종은 참지의정부사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에 증직하고 강성군으로 봉하였으며, 시호를 충선이라 하여 부조묘를 세우라 명하였다.
세종대왕은 대광보국 승록대부의정부 영의정을 추서하고 부민후로 초봉하였다.
부민각(富民閣) - 三憂堂 文益漸선생이 70세인 1400년 2월 8일 본가에서 돌아가시자
정종은 선생의 공과 덕이 지극히 크고 높음을 기리어 예장(禮葬)할 것을 명하였다.
이어 태종도 참지의정부사예문관제학동지춘추관사에 추증(追贈)하고
강성군(江城君)에 봉했으며 시호를 충선공(忠宣公)이라 하고 부조묘(不眺廟)를 세우라 명하였다.
세종대와 또한 선왕들의 뜻을 이어 대광보국 승록대부의정부 영의정을 추증하고
부민후(富民候)를 추봉하였다. 이 의의를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7간(間) 집을 짓고 부민각이라 이름하였다.
효자비각(孝子碑閣) - 선생은 모상(母喪)을 당하여 3년 시묘중 왜적이 침입하여
살생을 일삼으니 단성일경이 피난가고 아무도 없었으나, 홀로 여막을 지키고 있어
이에 왜적도 감동하여 물해효자(勿害孝子)라는 표시를 함으로 단성일경이 화를 면하였다.
조정에서 선생 53歲 때 비를 세우고 이마을을 효자리라 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