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雲의 배움터/명시선집 1

가을에/ 서정주

花雲(화운) 2018. 8. 22. 12:33


가을에/ 서정주


오게

低俗(저속)에 抗拒(항거)하기에 여울지는 자네.

그 소슬한 시름의 주름살들 그대로 데리고

기러기 앞서서 떠나가야 할

삷게도 빛나는 외로운 雁行(안항)-이마와 가슴으로 걸어야 하는

가을 雁行(안항)이 비롯해야 할 때는 지금일세.


작년에 피었던 우리 마지막 꽃-菊花(국화)꽃이 있던 자리

올해 또 새 것이 자넬 달래 일어나려고

白露(백로)는 霜江(상강)으로 우릴 내리 모네.


오게

지금은 가다듬어진 구름.

헤매고 뒹굴다가 가다듬어진 구름은

이제는 楊貴妃(양귀비)의 피비린내나는 사연으로는 우릴 가로막지 않고,

휘영청한 開闢(개벽)은 또 한번 뒷門(문)으로부터

우릴 다지려

아침마다 그 서리 묻은 얼굴들을 추켜들 때일세.


오게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을 아는 이.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프르고도 여린

門(문)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미당 서정주 시전집』. 민음사. 1983


작품해설

  서정주의 이 시는 가을을 제개로 한 수많은 한국시 가운데서도 수작에 해당한다. 미당의 이 시에는 계절적 보편성을 뛰어넘는 정신의 힘이 담겨 있다. 가을은 춥고 고달픈 겨울을 향해가는 시간의 길목이다. 이 시간의 길목에서 화자는 감상적 포즈를 버리고 우리의 정신이 보다 견고해져야 함을 강조한다. '저속에 항거'하며 봄을 지나, 여름을 지나 힘겨웠던 우리들에게 시인은 "오게/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을 아는 이"라고 고무한다. "그 소슬한 시름의 주름살들 그대로 데리고" 오라고 말한다. 삶의 고통으로 주름진 그 모습 그대로의 스스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가을의 시간 앞에 서라고 권유하는 것이다.

이제 지난 시간보다 더 힘겨운 "가을 안행이 비롯해야 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차가운 바람을 가르며 "이마와 가슴으로 걸어야 하는" 전력투구의 시간이라 할 수 있다. 화자는 이 가을 안항을 섧고도 빛나는 외로움이라 말한다. 거친 삶과 밪서는 존재의 고결한 실천은 외롭지만 빛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가을 안항을 시작해야 하는 이 시간의 지점에서 국화는 서리를 얼굴에 묻힌 채 새로 핀다. 조락의 계절에 시인은 오히려 강한 생명의 국화를 직시함으로써 저 강인함이 "자넬 달래 일어나려고" 피어난다며 위로한다. 한편 "헤매고 뒹굴다가 가다듬어진 구름"처럼 인간 삶의 슬픈 사연들도 가다듬어져 우릴 가로막지 않는다는 것은 내면적 방황도 끝내야 함을 암시한다. 이제 존재의 내부는 단단하게 정돈된 상태에 이르러 먼 길을 예비해야 한다 밸로에서 서리 내리는 상강으로 내모는 가을 복판에서 시름으로 주름진 자네에게 이 시의 화자는 더 춥고 혹독한 것을 이겨내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의 가을은 쇠락의 계절이 아니라 새로 시작하는 '휘영청한 개벽'의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은 개벽의 시간을 "아침마다 그 서리 묻은 얼굴들을 추켜들 때"라는 표현으로 의인화한다. 추위를 이려내는 추켜듦의 자세에는 주저앉지 않고 꼿꼿하게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존재의 의지가 함의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을은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도 여린/門들이 열릴 때"라는 역설의 시간이다. 푸른 여름이 쫓겨나는 마당귀에서 우리는 다시 푸른 개벽의 시간을 맞이하며 가을 안항을 힘차게 다시 시작해야 하리라.


  이 시에는 가을을 맞이한 자에 대한 지극한 위로와 고무가 담겨 있다.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을 아는이"라는 구절에서 '아직도 오히려'가 강조된 까닭은 고통 속에서 인생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를 뜻한다. 이 문장은 삶의 무수한 고통을 이겨낸 당신은 여전히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랴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아울러 그런 당신이라면 고통의 징표인 "소슬한 시름의 주름살들"을 부정하지 않으며 앞으로 닥텨올 혹독한 겨울을 이겨낼 수 있다는 위로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쓸쓸함과 외로움으로 물드는 가으르 삶을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은 마음으로 헤맴이 계속되는 계절 앞에서 시인은 독자에게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힘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시/ 대학생들이 던진 33가지 질문에 답하기- 엄경희

새움출판사. 2011 

시의 깊이란 무엇인가?(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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