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창작과 비평 3/ 오세영
앞의 에피소드를 시로 쓰고자 할 때 "등산화의 끈이 끊긴 것은 삭은 끈에 가해진 두꺼운 양말의 압력 때문이었다'라고 쓴다면 시가 될 수 없지만 '등산화의 끈긴 것은 벼랑에서의 추락을 예고한 것이다"라고 쓴다면 최소한 시가 될 가능성이 있다. 시 창작이나 시 독서에서 통찰보다도 오히려 더 중요한 정신활동은 상상력이다. 시인은 우선 세계 혹은 대상을 통찰로써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시인이 대상이나 세계를 통찰하여 깨우친 진실은 비록 날카롭고 심오하다고 할지라도 아직은 철학적 단상이나 추상적 사고 이상이 될 수 없다. 그리하여 시인은 다음 단계로 그것을 구체화하고 발전시켜 하나의 형태 혹은 감각적인지가 가능한 상태로 만들고자 한다. 이때 중요한 역할을 발휘하는 것이 상상력이다. 그러므로 상상력이란 통찰에서 얻어진 시적 진실을 구체화하고 체계화하는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단계에서도 순수한 사고는 필요하다.
그러나 상상력이 보다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상상력은 간단히 논리를 초월한 사고라고 정의될 수 있다. 그것은 극적으로 모순의 사고에 다다르기도 한다. 따라서 상상력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 즉 단순한 사고와 구분된다. 가령 "꽃밭에 장미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순수한 사고를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꽃밭에는 장미 한 그루가 등불을 밝히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상상력의 표현이다. 이때 '장미꽃'은 '등불'로 환치되고 있는 이는 사실에 근거를 둔 논리적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된 자가 처음 된다" 혹은 "나는 님을 보냈지만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와 같은 경지의 '모순의 사고'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에서 극단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훌륭한 상상력은 모순의 사고 속에 어떤 심오한 진리를 지닌 것이다. 상상력은 또한 유추, 연상, 환상 등과 구분된다. 유추란 한 사물이 다른 사물과 총체적이고도 논리적으로 대응될 때 이루어지는 사유체계이다. 예컨대 카메라와 인간의 눈은 유추의 관계에 있다. 그것은 인간의 수정체가 렌즈에, 각막이 조리개에, 눈거풀이 뚜껑에, 망막이 필름에 각각 논리적으로 대응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카메라의 원리를 잘 모르는 사람에겐 자신의 눈을 대배시켜 설명한다면 그는 쉽게 카메라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상상력은 연상과 부분된다. 연상은 유추처럼 한 사물의 전체가 다른 사물의 전체와 논리적으로 대응되지는 않지만 어떤 부분이나 특징 특히 기억의 유사성에서 기인하여 건너뛰는 사유체계이다. 가령 붉은 색의 깃발을 보자 피를 생각하고 형님을 생각하자 고향의 추억을 생각하는 따위이다.
전체적으로 대응되지는 않지만 붉은 색과 피의 색은 유사하고 피를 흘리는 행위와 전쟁의 살육은 유사하며 어린시절의 형과 자신과는 고향이라는 기억에서 결합되기 때문이다. 환상은 백일몽에 가까운 것으로 무책임한 사유를 의미한다. 환상은 대상으로부터 그 어떤 구속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상상이다. 달리 말하여 환상이란 인식의 대상이 없는 주관 홀로의 사고 유희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연의 느낌만이 산만하게 제시될 뿐이다. 이에 대하여 상상력은 최소한 대상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환상과, 유사성을 넘어 직관적으로 대상에 틈입한다는 점에서 연상과 각각 구분될 수 있다.
그리고 대상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논리적으로 전체와 대응하는 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또한 유추와 다르다. 그러나 상상력에 논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성적인 논리가 아닌 감성의 논리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환상에서는 이 감성의 논리조차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통찰과 상상력은 기본적으로 시의 원천에서 길러진 것들이다. 그러므로 시의 원천을 계발하는 수고를 멀리하고 통찰과 상상력을 행사 하려는 것은 마치 사료를 먹이지 않은 소에서 젖을 짜려는 행위에 다름이 없다.
③, ②의 단계를 성공리에 마친 시인은 이미 그 사고 속에 한 편의 시가 마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남은 문제는 그것을 실제로 언어화하여 원고에 기술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시적 형상화의 단계라 부르는 것에서의 작업이다. 그런데 이 단계는 다시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진다. 하는 언어의 외면적 측면이요 다른 하나는 언어의 내면적 측면이다. 우선 전자부터 살펴볼 경우 시의 언어는 필연적으로 운율을 가져야 한다. 현대시는 그 이전과 달리 외형적인 율격이 없는 소위 자유시형으로 쓰여져서 언뜻 운율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현대시도 비록 어떤 법칙으로 정해진 소위 정형률은 아니라 하더라도 나름대로 미묘한 내재율을 가지지 않고서는 결코 훌륭한 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내재율이란 논리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시인의 언어적인 감수성과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리 하여 우리로서는 다만 그와 같은 언어의 음악적 감수성을 천부적으로 갖고 태어난 시인이라면 더 바랄 바 없겠으나 그렇지 않은 시인의 경우는 후천적으로 이를 꾸준히 연마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 연마의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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