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의 예술론과 산문미학
비슷한 것은 가짜다- 정민. 태학사. 2000
P104
시인은 가슴 속에 대나무를 키우는 사람들이다. 시인은 눈 속에서 잣나무를 보는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눈 앞읫 ㅏ물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투명산 시선으로 가슴을 열어 삼물을 바라볼 때, 사물은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고, 해무리 달무리로 아롱진다. 이런 설레임, 이런 두근거림이 없는 시는 시가 아니다.
P108
"와! 진짜 같다. 정말 꼭 같다." 이런 말들 속에는 이미 가짜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다르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왜 비슷해지려 하는가? 왜 '眞'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似(사)'를 찾아 헤매는가? 비슷한 것은 이미 진짜가 아니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 그러니 비슷해지려 하지 말아라... 여기서 연암은 다시 '心似'와 形似'라는 두 개념을 이끌어낸다. 심사란 표현은 달라도 정신이 같은 것이고 현사란 겉모습은 같지만 실질은 다른 것이다. 형사는 결국 '似'에 그치지만, 심사는 끝내 '眞'에 도달한다....(P108) 똑같이 해서는 똑같이 될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심동모이(心同貌異)의 방법이다. 심동모이의 모방은 시간을 뛰어넘고, 공간의 장애를 극복해낸다. 아득한 과거가 지금과 나란히 만나고, 지구 저편의 일이 바로 내일로 된다. 이것이 바로 연암이 말하고 있는 心似다.
P112
진정한 고전은 옛날에 있지 않고 바로 지금에 있다. 우리가 옛것을 흠모하여 그것을 따르고 흉내낼수록 우리는 옛것에서 멀어진다. 중요한 것은 정신이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정신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P167
새 것을 추구해서도 안되고, 옛것을 딸가소도 안된다면 어찌해야 할까? 이도 저도 안된다면 그만두는 것이 어떨까?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다소 심각해진 이 질문 앞에 연암은 비로소 처방을 슬며시 내놓는다. 그섯은 '법고이지변(法古而知變), 창신이능전(創新而能典)'이란 열 글자이다. 옛것을 본받으라고 하면 겉껍데기만을 흉내내니 문제가 되고, 새 것을 만들라고 하면 듣도 보도 못한 가당치도 않은 황당한 말만 하고 있으니 문제가 된다. 그러니 옛것을 본받더라도 오늘에 맞게 변화시킬 줄 알고, 새 것을 만들더라도 법도에서 어긋나지 않게 한다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이것은 결코 어정쩡한 중간항을 도출하여 적당히 타협하자는 비빔밥 문학론이 아니다. 실로 연암문학론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놓인다.
P168
'옛것을 본받되 변화할 줄 알아라'와 '새 것을 만들되 법도에 맞도록 하라'는 것은 결국 같은 말이다. 그렇게 할 때 '지금 글'이 곧 '옛글'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옛글이란 무엇인가? 옛날 사람이 자기 당시의 생각을 당대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그것이 시간이 흐르고 보니 옛글로 되었다. 지금 글이란 무엇인가? 지금 사람이 지금 생각을 지금 말로 쓴 것이다. 이것도 먼 훗날에는 옛글로 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의 고문, 즉 '옛글'이란 옛사람의 흉내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닐 터이다. 진정한 고문은 바로 '지금 글'을 추구할 때 획득된다. 이럴 때만이 '지금' 것이 '옛' 것으로 될 수 있다.
P172
하늘과 땅은 비록 오래되었지만 끊임없이 새 생명을 낸다. 해와 달은 오래되었어도 그 빛이 날로 새롭다. 인간의 삶도 돌고 도는 것이지만 똑같이 반복되는 법이 없다. 책에 실려 있는 내용이 제아무리 방대하다 해도 담긴 뜻은 제각금이다. 일정한 것은 없다. 고정불변의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는 아직도 미질 덮여 있다. 기지(旣知)의 바탕 위에서 미지의 영역을 개척해 내는 것이야말로 문학하는 사람의 사명이 아닌가?
P189
글을 잘 하는 자는 병법을 아는 것일까? 글자는 비유컨대 병사이고 뜻은 비유하면 장수이다. 제목이라는 것은 적국이고, 전당(戰掌) 故事는 싸움터의 진지이다. 글자를 묶어 구절이 되고, 구절을 엮어 문장을 이루는 것은 부대의 대오(隊伍) 행진과 같다. 韻으로 소리를 내고, 詞호 표현을 빛나게 하는 것은 군대의 나팔이나 북 깃발과 같다. 조응이라는 것은 봉화이고, 비유라는 것은 유격의 기명이다. 억양반복이라는 것은 끝까지 싸워 남김 없이 죽이는 것이고, 제목을 깨뜨리고 나서[破題] 다시 묶어 주는 것은 성벽을 먼저 기어 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이다.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반백의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도, 여음이 있다는 것은 군대를 떨쳐 개선하는 것이다.
P256
연암은... 조선 땅에서 한바탕 울음을 울 만한 곳을 두 군데 소개한다. 하나는 금강산 비로봉 꼭대기에서 동해 바다를 바라볼 때이고, 다른 하나는 황해도 장연(長淵) 바닷가 금사상(金沙山)이 그곳이다. ... 살아가는 일은 답답하고 속터지는 일이다. 봄날 죽순이 땅을 밀고 솟아나듯, 내 존재의 깊은 곳에서부터 겉잡을 수 없이 터져나오는 울음과 만날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진정에서 나와 뼛속까지 스며드는 그런 울음은 어디에 있는가? 갓난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터뜨리는 첫 소리 같은 울음을 어떻게 울 수 있을까? 나의 시, 나의 노래는 그러한 울음이었던가?
P325
제목은 '연암집을 읽고'인데 한편 전체를 통틀어도 연암이라는 글자가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수십 년 전에 있었던 어떤 사람, 마음만 먹었으면 인사를 나눌 수도 있었던 그 사람의 이야기만 나온다.... 그의 글에서 변하지 않는 요소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읽어도 가슴을 뛰게하고, 태초의 그 감동을 그대로 지녀 있다는 바로 그 점일 뿐이다. 언제 읽어도 새로운 글, 읽으면 읽을수록 낯설어지는 글 그는 어떻게 그런 글을 쓸 수 있었을까?
홍길주는 《연암집》을 읽고 느낀 감동을 담담한 어조 속에 뭉클하게 담아내었다. 그는 장광설로 연암 문장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대신,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얼국을 화두 삼아 미료하고 맛깔스럽게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고 있다.
연암! 내게 수십 년 전 내 모습을 기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한 사람. 어제의 나는 이미 내가 아님을, 우리는 언제나 새롭게 시작해야 함을, 정말 위대한 정신은 시간 속에서 빛이 바래지 않음을 알려준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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