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雲의 사진이야기/공원·유적지

창경궁 2

花雲(화운) 2012. 9. 15. 15:29

함인정(涵仁亭)

원래 인양전(仁陽殿)이 있던 터에 1633년(인조 11) 건립된 정자이다. 남향에다 앞마당이 넓게 트여 있어

왕이 신하들을 만나고 경연을 하는 곳으로 이용하였다. 830년에 소실되었다가 1833년에 재건되었다.

함인정은 건물 사방이 벽체 없이 시원하게 개방된 모습인데, <동궐도>에는 지금과 달리 3면이 막혀 있다.

 

 

 

 

 

함인정 앞의 넓은 마당

창경궁이 훼손되고 복구되는 과정에서 미로처럼 복잡하던 행각들은 대부분 복원되지 않아 넓은 공간에

건물만 홀로 서 있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함인정 앞의 넓은 마당은 동궐도에도 그대로 나와 있어,

이곳에서 각종 공연이 열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환경전(歡慶殿)

왕이나 세자가 기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환경전에서 중종을 진료한 대장금

조선시대의 의녀들 중 유일하게 왕의 주치의 역할을 했던 이가 대장금이다. 대장금은 1515년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출산을 맡았고, 1522년 자순대비의 병을 치료한 후 이 공으로 중종의 치료를 전담하게 된다.

대신들은 의원이 아닌 일개 의녀를 주치의로 삼은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중종은 의원보다 대장금을

더욱 신뢰하여 마지막까지 대장금에게 진효를 맡겼다. 중종은 오랫동안 앓아 오던 풍증과 그에 대한

합병증으로 1544년(중종 39)에 환경전에서 승하하였다. <중종실록>에는 1524년까지 20년동안 수차례에

걸쳐 대장금의 진료기록이 나온다.

경춘정(景春殿)

왕실의 생로병사가 이루어진 곳

경춘전과 환경전은 통명전, 양화당과 함께 창경궁의 내전을 이루는 침전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왕과 왕비의

일상생활과 생로병사가 이루어졌다. 경춘전은 성종이 1483년에 인수대비를 위해 지은 대비의 침전이다.

그러나 정조와 헌종이 이곳에서 탄생하고 많은 왕후들이 여기서 승하한 것으로 보아, 대비뿐 아니라 왕비와

세자빈도 많이 사용한 듯하다.

이에 비해 환경전은 왕이나 세자가 기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본인의 탄생을 기념해 경춘전 내부에

'誕生殿"이라고 친히 쓴 현판을 걸기도 했다. 두 건물 모두 창경궁 당시 세웠다가 임진왜란, 이괄의 난, 순조

연간 대화재 등으로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834년(순조 34)에 재건한 것이다.

 

 

 

 

 

 

양화당(養和堂)

양화당은 내전의 접대공간으로 사용되었으나, 병자호란 때 인조가 환도하면서 머무르기도 했다. 지금의

통명전과 양화당은 1834년에 재건한 것이다.

통명전(通明殿)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한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으뜸 전각이다.

월대 위에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고 넓적한

박석을 깔았다. 서쪽 마당에는 동그란 샘과 네모난 연못이 있으며, 그 주변에 정교하게 돌난간을 두르고

작은 돌다리를 놓았다. 통명전은 주로 왕비의 침전으로 사용하였지만, 중종과 명종비의 빈전으로 사용된

적도 있고 경종은 편전으로 사용하였다.

영춘헌(迎春軒)과 집복헌(集福軒)

후궁들의 처소

양화당 동쪽에 자리한 영춘헌 일원에는 주로 후궁들이 거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향인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며, 집복헌은 영춘헌 서쪽 방향에 5칸으로 연결된 서행각이다.

이 건물들의 장건 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1830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34년에 재건되었다.

이때 영춘헌은 창덕궁 중희당 부근에 있던 장남궁을 헐어 재건했다. 집복헌에서는 사도세자와 순조가

탄생했다. 정조는 순조를 낳은 수빈 박씨를 총애해 집복헌에 자주 출입하면서 가까운 영춘헌을 독서실겸

집무실로 이용하기도 했다.

영춘헌과 정조 독살설

영춘한은 왕이 거처하던 곳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박한 모습이어서 정조의 검약한 성품을 느낄 수

있다. 정조는 등에 난 종기가 원인이 되어 49세로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다. 뛰어난 의한 실력을 갖춘 정조는 의원과 직접 의논하고 약방문을 지정해 주는 등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진찰을 시작한지 불과 15일 만에

죽음을 맞게 된다. 정조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정적 정순왕후의 거처인 '수정전'이었기에 정조의 독살설은

아직까지도 의문으로 남아 있다.

내전 터 일원

이 일대의 숲은 궁궐 여성들의 처소가 모여 있던 생활구역이었다. 궁녀들의 작은 처소들과 어린 왕자들과

관련된 건물들도 섞여 있었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이 일대의 모든 내전들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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