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雲의 사진이야기/공원·유적지

경복궁 2

花雲(화운) 2012. 3. 11. 09:46

강령전(康寧殿)과 교태전(交泰殿)

왕실의 생활이 묻어 있는 곳- 강녕전과 교태전

왕과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는 곳을 침전이라고 한다. 강녕전은 왕의 침전으로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덕을 좋아하여 즐겨 행하는 일), 고종명(考終命, 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의

오복에서 가운데에 해당하는 '강녕'의 의미를 담아 이름 줕여졌다. 왕은 이곳에서 독서와 휴식 등

일상생활뿐 아니라 신하들과 은밀한 정무를 보기도 했다. '정(井)'자 모양으로 9개의 방을 구성하여

한 가운데 방은 왕이 사용하고, 주위의 방에서는 상궁이 숙직을 하였다.

 

 

 

교태전은 경복궁 창건 당시 지어진 건물이 아니라 1440년(세종 22)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왕비의 침전으로 궐 안의 살림살이를 총지휘하던 곳이다.

 

 

 

국립민속박물관

건청궁(乾淸宮)

건청궁은 고종이 1873년(고종10)에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나

친정 체제를 구축하면서 정치적 자림의 일환으로 건청궁울 세웠다.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

왕의 처소인 장안당, 서재인 관문각으로 이루어졌으며,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암살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1909년에 헐린 후 1939년에미술관이 들어섰고, 해방 이후 민속박물관으로

쓰이다가 헐렸다. 2007년에 관문각을 제외한 전각들을 복원했다.

 

건청궁에서의 마지막 밤과 아관파천

경복궁 전각들 중 '궁'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은 건청궁이 유일하다. 건청숭은 고종을 위한

궁궐 안의 궁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고종이 건청궁에서 생활한 것은 10년 남짓한 세월뿐이다.

을미사변 후 고종은 늘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야 했다. 일본이 장악하고 있는 경복궁에서

벗어나기 위헤 고종은 미국공사관으로 옮겨 가려다 실패하고, 드디어 1896년 2월 11일 새벽에 변복을

한 채 세자만 데리고 궁을 빠져나가 러시아공사관으로 갔다. 이를 '아관파천'이라 한다. '아관파천' 이후

조선 왕조는 다시는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명성황후의 비극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시작한다.

이에 친러정책을 구사하며 일제에 정면으로 맞섰던 명성황후는 건청궁에서 참혹한 죽임을 당하게 된다. 1895년 10월8일(음력 8월 20일), 일본공사관 직원, 일본군, 일본 깡패들이 건청궁에 난입하여

황후를 찔러 죽이고 그 시신마저도 녹산에서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이 명성황후 암살사건, 이른바 을미사변이다 

 

 

 

 

 

후궁과 궁녀들을 위한 공간- 함화당(咸和堂)과 집경당(緝敬堂)

교태전 북쪽인 아미산 너머에는 흥복전 일원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 일대는 후궁과 궁녀들을 위한

영역이다. 침전으로 쓰였던 수많은 전각과 복잡한 생각들은 거의 사라지고, 현재는 함화당과 집경당만이

 남아 있다. 이나마도 일제가 동궁터에 지은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운영하면서 사무실로 쓰기 위해 헐지 않아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흥복전은 빈궁전으로서 중궁전인 교태전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으되

격을 한 단계 낮추어 지었다. 그런데 신정왕후가 이곳 흥복전에서 승하한 것으로 보아 대비전의 용도로

쓰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함화당과 집경당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고종이 건청궁에 머물 당시 여기서

외국 사신을 접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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