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곡 최순우 연보
혜곡 최순우 연보
1916.4.27. 개성 자남산 서남쪽 지파리 해나무골(괴곡)에서 부친 최종성과 모친
양순섬 사이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희순(熙淳)으로(순우는 필명),
네 명의 형과 한 명의 누나가 있었다.
1930.3.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송도고보, 개화기 선구자 좌옹 윤치호가 설립한
5년제 학교)에 입학해서 문예반 활동. 12월 5일. <동아일보>에 동시 '밤'
발표. 1932년. 3월 3일. <동아일보>에서 시 '버들강아지' 발표.
1934. 송도고보 5학년 여름방학 때 개성부립박물관에 갔다가 당시 관장이던
우현 고유섭을만나 고미술 연구를 권유받음. 가을에 개성 여인 박금섭과
결혼.
1935~1943. 개풍군청 고적계에서 서기로 근무. 이때부터 고유섭을 따라 개성과 개풍군
일대의 고려 유적지 답사. 고유섭의 서가에 있던 《조선총동부박물관
진열품 도감》 고려청자편을 교과서 삼아 공부.
1936~1943. 개성 호수돈여고에서 문학(조선어)강사. 군청 고적계 일과 병행(당시 개풍
군청에서는 일부 이간의 겸직 허용)
1943. 개풍군청 고적계 서기에서 개성부청 서기로 이직. 제4차 조선교육령으로
모든 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이 폐지됨에 따라 호수돈여고 강사생활 마감.
1914.12.3. 국립박물관이 경복궁 안에서 개관. 12월 20일. 미군정청이 개성시립박물
관장으로 이풍재 임명. 최순우는 서기로 근무 시작.
1946.4.15. 개성시립박물관의 행정적 지위가 국립박물관 개성분관으로 변경, 최순우도
국립박물관 개성분관 서기로 발령.
1947.9.23. <서울신문>에 '개성 출토 청자파편' 발표. 최순우가 남긴 600편의 문화재
관련 글 중 첫 글.
1949.8. 서울의 국립박물관으로 발령. 12우러 12일. 박물감(현대학예연구사)으로
승진 발령.
1950.4. 국립박물관에서 '국보특별전시회' 개최. 이때 두 번째 스승인 간송 전형필을
만남.
1950.6.25~1951.5. 북한군의 1차 서울 점령 당시 간송미술관에 파견되어 보화각에
소장된 주요 유물의 북송을 위한 포장작업을 지시받았지만 지연작전으로
저지. 서울 수복 후, 국립박물관 서류 및 유물 포장과 부산으로 피난시키는
작업. 서울 재탈환 후 홀로 서울에 와서 2차 유물 피난작업 임무 완수.
1952.11. 부석사 지붕 누수 조사를 위해 방문. 이때 느낀 감정을 쓴 글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임.
1954.1. 국립박물관 보급과장(1961년에 미술과장으로 직책명이 바뀜). 9월에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강의 시작(강사).
1954. 전형필이 '순우(淳雨)"라는 필명을 지어줌.
1955. 전형필이 '혜곡(兮谷)'이라는 아호를 지어줌.
1957.12.~1958.8. 미국 8개 도시 순회 '난국국보전' 중 워싱턴DC, 뉴욕, 보스턴, 시애틀
까지 유물 호송 및 전시 담당 학예관(이휴 전시는 김원룡과 진홍섭이 담당).
1959.5.9. <동아일보>에 '겸재 예술의 독자성' 발표. 이 무렵 전형필 수장품에 대해
집중 연구. 홍익대에서 다시 강의. 이화여대에서도 강의 시작.
1960.5. 한국 미술의 역사를 2000년이라고 규정하는 글 발표. 8월에는 전형필,
김원룡, 진홍섭, 황수영 등과 함께 우리나나 최초의 고고미술 월간지
《고고미술》 창간.
1961.3.23~1962.6.30 유럽 5개국 순회 '한국국보전' 유물 호송 및 전시 담당 학예관.
1963.9. 국립박물관의 첫 초상화 전시회. <동아일보>에 전시 초상화를 해설하는
글 연재. 다음해에는 <조선일보>에 '고미술에 나타난 한국의 미녀' 연재.
1964.3. 국립박물관에서 고려청자 병종류 특별전시회.
1964.5 전남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117번지에서 청자기와 가마터 발견. 이후
국립박물관에서 1982년 가을까지 18년 동안 지속적으로 발굴작업 진행.
강진이 '청자의 고향'으로 자리매김하는 단초가 된 대발견
1965. <조선일보>에 '고미술에 나타난 한국의 미남' 연재. 여성잡지 《여원》에
'한국미의 아름다움'에 대한 장문의 글 연재.
1966.5. 한일협정에 따른 문화재 인수를 위해 국립박물관 대표로 일본에 가서
이토 히로부미가 개성에서 도굴해 일왕에게 진상했던 고려청자 20여
점을 비롯,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반출됐던 문화재 중 일부를 환수해옴
(고미술픔 438점, 책종류 852점, 우표 등 체신관련 자료 36점, 총 1,326점).
1966.10. 석가탑 보수복원공사 때의 일부 훼손이 감독 소홀 탓이라는 이유로 문화재
보호법 60조 및 70조 위반으로 경주경찰서에 형사입건. 나중에 무혐의
처리. 12월 23일 석가탑 복원공사 성공적으로 마무리.
1969.8. 전라남북도 지역의 주요 사찰에 있는 불화 조사시작. 《주간조선》에
조선시대 풍속화 해설글 연재.
1970. <박물관뉴우스>(나중에 '박물관 신문'으로 제호 변경)에 '조선화가'라는
제목으로 매달 조선시대 화가와 대표작 이야기 연재. 3월에는 오사카에서
열리는 '엑스포 70'에 전시할 우리나라 문화재 호송.
1971. 《고고미술》 발행을 후원하는 호림 윤장섭에게 체계적인 문화재 수집을
위한 조언 시작. 1981년 그가 수집품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며 호림박물관
건축을 위한 문화재단을 만들 때 행정적인 협조.
1972.8.25. 국립박물관이 다시 경복궁으로 이전해 개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꿈. 11월 14일부터 한 달 동안 '한국 명화 근 500년전'을 개최. <중앙일보
>에 줄품작 해설 연재.
1973.3.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과장에서 학예연구실장으로 승진발령. 4월 27일부터
'한국미술 2000년전' 특별전시. 두 달 동안 25만 명 관람.
1974.6.18. 제4대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에 취임.
1975. 서울 암사동 신석기 시대 유적지(현재 선사유적공원)에 대한 4차 조사 완료.
빗살무늬토기가 5000년 전인 기원전 3000년 토기임이 밝혀져 한국 미술의
역사를 2000년에서 5000년으로 수정. 10월 15일. '한국 미술 5000년
정리본 개최를 위한 협약에 서명.
1976.1. 성북동 126-20번지(현재 '최순우옛집')으로 이사.
1976.2.23~7.25. 일본에서 '한국 미술 5000년전' 순회전시.
1979.5.1~1981.9.30 미숙에서 '한국 미슬 5000년전' 순회전시.
1981.2.23. 홍익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 받음.
1982.3. 정부에서 경복궁 국립중앙박물관을 중앙청으로 이전하다는 계획 발표.
이때부터 이전계획 수립. 공청회 개최 등을 비롯한 이전 준비에 전념.
1982.8.1.~12.4. 일본에서 '한국고대문화전-신라 천년의 미' 순회전시.
1984.2.25. 영국에서 '한국 미술 5000년전' 유럽 순회전시 시작.
1984.10. 중앙청 전시실 설계 문제로 고심하던 중. 숙환으로 고려병원에 입원.
1984.12.15. 성북동 자택에서 별세. 은관문화훈장 추서.
1985. 유언에 따라 생전의 연구자료 356점과 도서 516권을 국립중앙박물관
도서실에 기증 ('오수당문고').
1992. 《최순우전집》(전25권) 간행.
1994.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재서서》 간행.
2002.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간행.
2002.8~12. 최순우를 기억하고 사람하는 사람들의 모금으로 성북동 집을 구입해
'내셔널 트러스트 시민문화유산 제1호'로 등록(등록문화재 제268호).
2004. 혜곡 최순우 기념관인 '최순우 옛집'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