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雲의 배움터/漢詩 2

중화척을 내린 정조 임금의 뜻- 정조, 정약용

花雲(화운) 2018. 8. 11. 11:41


중화절에 자를 반사하노라- 정조



颁尺中和節 (반척중화절)   중화절에 자를 반사하노라

紅泥下九重 (홍니하구중)   조서가 궁월로부터 내려가네.

拱星依紫極 (공성의자극)   뭇별은 북극성을 의지하였고

絫黍叶黃鐘 (류서협황종)   누서는 황종 길이 들어맞누나.

漢帝提三日 (한제제삼일)   한제가 삼척검을 들던 날이요

陳君臥百容 (진군와백용)   진군이 백척루에 무운 모습이로다.

裁來五色線 (재래오색선)   그대들이 오색실을 마름질하여

許爾補山龍 (허이보산룡)   산 무늬용무늬를 기워주게나.


* 紅泥: 붉은 찰흙. 한나라 황제가 내리는 조서는 붉은 찰흙으로 봉함을 하였다 하여

           왕이 내리는 글을 뜻한다.

* 絫黍: 본디 무게를 다는 두 단위로 '누'는 기장 낱알 열 개의 무게이고 '서'는 기장 낱알

           한 개의 무게인데, 여기서는 무게가 아닌 폭을 뜻한다.

* 陳君: 진군은 삼국시대 위나라의 고사 진등을 가리킨다.

* 許爾補山龍: 산 무늬와 용 무늬은 왕이 입는 곤룡포에 수놓아진 것들을 말하는데, 곧

           신하들에게 자신을 잘 보좌해 달라고 부탁하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작품해설

중화절인 음력 2월 초하룻날 중국 조정에서는 천자가 대신과 외척들에게 중화척이라는

잣대를 내렸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조가 1796년(정조 20년) 2월 처음으로 중국 조정의

고사에 따라 신하들에게 중화척을 나눠주고 어제시 한 수를 지어 보였다.

정조는 잣대의 작은 눈금들이 큰 눈금을 기중으로 삼아 질서 있게 놓여 있듯이, 조성의

신하들도 국왕인 자신을 중심으로 제 역할을 해 줄 것을 당부했다. 중화척을 하사받은

신하 중 한 사람이 바로 다신 정약용이었다.


정약용은 22세 때 경의진사가 된 후 줄곧 정조의 총애를 받아 이후 암행어사, 참의, 좌우

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이 시기 그의 공적으로 1789년 배다리 준공과 1792년 수원성

설계가 이뤄진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1791년 진산 사건 이후 천주교로 조정이

시끄럽던중 정조는 수세에 몰린 정약용을 피신시키기 위해 병조참의에서 금정찰방으로

강등 좌천시켰다. 이러한 정황에서 종조는 자신이 정약용을 잊지 않고 잇음을 알리는

뜻으로 중화척을 내리고, 이어 자신의 시에 화답하는 시를 짓게 명했던 것이다. 이에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다.


임금께서 중화척을 내려 주시면서 곁들여 보내신 시에 화답하다

- 정약용 賡和內賜中和尺兼簡御詩韻(갱화내사중화척겸간어시운),

병진년(1796년 2월 6일). 『다산시문집』권2


令節中和節 (령절중화절)   경사스러운 명절 중화절을 맞아

紅牙錦帕重 (홍아금말중 )   비단으로 싸고 싼 단향목 잣대

星文羅玉版 (성문라옥판 )   잔별 무뉘 옥판에 줄지어 있고

奎韻發洪鐘 (규운발홍종)   임금님 노래한 시 큰 종이 울려

未有纖毫報 (미유섬호보)   털끝만 한 보답도 하지 못한 몸

偏蒙大度容 (편몽대도용)   큰 도량의 포용을 크게 입었네.

鳳池隨染翰 (봉지수염한)   재상들 뒤를 따라 붓대를 잡아

蕪拙愧群龍 (무졸괴군룡)   치졸한 시 여러 명사들에게 부끄럽기만.


이렇듯 정조가 특별히 지우(知遇)했전 정약용은 중화척 외에 정조로부터 특별한 책을

선물 받기도 했다.


유월 십이일 한서를 하사받고 삼가 그 은덕에 관하여 쓰다

- 정약용  六月十二日蒙賜漢書恭述恩念(유월십이일몽사한서공술은념), 幷序(병서).

『다산시문집』권4


東出笤溪學捕魚 (동출소계학포어)   동으로 소내에 가 고기잡이에 맛 들였는데

綠綈恩召到田廬 (록제은소도전려)   님이 부르신 초록 명주가 시골집에까지 왔네.

已移靑瑣開唐館 (이이청쇄개당관)   주자소를 이미 옮겨 별관을 열었으며

別裹緗緘降漢書 (별과상함강한서)   황색 보료 곱게 싸서 한서를 내리셨다.

聖主應嫌棄菅蒯 (성주응혐기관괴)   간과를 버리신 것 님께서도 언짢아하시니

此生何忍憶樵漁 (차생하인억초어)   이생인들 어찌 차마 물고기 잡고 나무하며 지내리까?

長抛李泌歸山計 (장포이필귀산계)   산으로 갈 이필의 계획을 영원히 포기하고 

妻子西來又奠居 (처자서래우전거)   처자 데리고 서로 와 살 곳을 정했다네.


이 글은 정조가 승하하던 날 정약용이 울면서 남긴 글이다. 다시 조정으로 들어와 책도

편찬하고 숙직도 서라는 뜻으로 정조가 내린 열권의 『한서선』이 근신 간의 영원한

이별의 선물이 되고 말았다.



한시 러브레터. 강혜선

(주)도서출판 북멘토.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