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만도 못한 인생- 허목
휘상인에게 주다- 허목
贈徽上人(증휘상인). 『기언』별집 권1
人生不如石 (인생불여석) 인생은 돌만 못하니
礧磈無崩毁 (뢰외무붕훼) 돌은 헐리고 무너짐이 없네.
彭殤一壽殀 (팽상일수요) 장수와 요절이 매한가지이니
不足爲悲喜 (부족위비희) 슬퍼하고 기뻐할 게 뭐랴?
작품해설
키가 크면서 몸매는 마르고 이마가 우묵한데, 유달리 긴 눈썹을 가졌다 하여 자신의
호를 미수(眉叟)라 한 문인이 있었느니 그는 남인의 정신적 영수였던 허목이다.
허목은 그의 집안 선영이 있는 경기도 연천에서 주로 살았다. 32세 때 박지계 사건
으로 정거된 이후 팔도의 명산대천을 유람하였고, 제자백가서를 섭렵하였다. 50여
세가 될 대까지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다가 56세에 처음 정릉참봉에 제수되었고,
63세에 본격적인 사환 생활을 시작했다.
1659년 효종이 죽은 후 인조의 계비이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 복상 문제로 남인이
서인에게 패하자 삼척부사로 좌천되었고(1660년), 68세(1662년) 가을 삼척부사를
그만두고 연천으로 다시 돌아갔다. 이로부너 10년을 한가로이 지내며, 날마다 책
읽기와 저술을 일삼았다.
허목이 생을 마감하던 해에 이웃한 산사의 스님이 찾아와서 글씨를 청하였는데 이때
써 준 시이다. 이해에 허목은 다음의 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朝日上東嶺 (조일상동령) 아침 해가 동산에 솟아오르니
烟霞生戶牖 (연하생호유) 안개와 노을 창 앛헤 피어나네.
不知山外事 (부지산외사) 산 너머 일이야 알 까닭 없고
墨葛寫蝌蚪 (묵갈사과두) 갈필에 먹 찍어 과두체를 쓰노라.
說讀古人書 (열독고인서) 기쁘게 옛글을 읽다
行年八十餘 (행년팔십여) 나이 팔십이 넘었네.
所爲百不如 (소위백불여) 한 짓 하나도 남 같지 못했으니
拙戇無如余 (졸당유여여) 졸렬하기 나 같은 사람 없네.
한 평생 말을 매우 삼가며 허물이 없고자 했던 허목은 자신의 문집을 『기언(期言)』
이라 붙였는데, 이 역시 자신의 말을 책임지기 위함이었다. 또 그는 노년에 '불여묵사
(不如嘿社)'라는 모임을 만들었는데 "말을 함부로 하지 말고 말을 삼가고 침묵함으로써
허물이 없게 하는 삶'이 취지였다.
이런 삶을 살았던 허목은 81세 때 숙종이 즉위하자 대사헌으로 특배되어 부름을 받은
뒤 1년에 다섯 번 영전을 거듭하여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82세의 나이에는 신하의
영예인 궤장(几杖)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궤장을 받을 나이까지 무사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이 모두 자신의 언행을 경계하여 허물을 적게 하려고 노럭하고 또 노력한
결과라 하였다.
84세데 판중추부사에서 물러나 향리로 돌아갈 때 숙종은 거택을 하사했다. 국초부터
숙종 대까지 2백 년간 거택을 하사받은 이가 셋 있는데 황희, 이원일 그리고 허복이었다.
한시 러브레터. 강혜선
(주)도서출판 북멘토.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