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문암의 인연- 김창협
죽기 전에 내 다시 여기 올 수 있을까?- 김창협
『농암집』권6
每憶騎牛過翕公 (매억기우과흡공) 소를 타고 보문암에 갔던 기억
夜聞禪誦白雲中 (야문선송백운중) 백운산에 독경 소리 한밤중에 울렸었지.
忽驚絶海相逢再 (홀경절해상봉재) 놀라워라 먼 바다서 다시 그를 만난 지금
更怪精慮舊號同 (갱괴정려구호동) 괴이하기도 하지, 정사 또한 옛 암자와 이름 같네.
貝葉題籤如作日 (퍠엽제첨여작일) 불경의 표지 글씨 예전 모습 그대론데
楊枝在手幾春風 (양지재수기춘풍) 손에 든 버들가지 봄바럼 몇 번이나 거쳤는가?
殘生未卜重來此 (잔생미복중래차) 죽기 전에 내 다시 여기 올 수 있을까?
甁錫他時倘復東 (병석타시당부동) 흡공이 이 다음에 행여 동쪽으로 찾아올까?
작품해설
농암 김창협은 1699년 봄(49세) 형님 김창집의 임소인 강화도를 찾아갔다가 풍광이
아름답다고 알려진 교동 앞바다의 보문암을 찾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20년 전
한 절에서 만났던 스님을 다시 만났는데 20년 전 그 스님을 만났던 절 이름 역시
보문암이었다. 농암은 이날의 사연을 적고 시 한 수를 지어 다시 만난 스님에게 작별
선물로 주었다.
20년 전이면 농암의 나이 29세로 인생의 장년기라 할 만한 때였다. 그러나 그해 8월에
서울을 떠나 영평 응암에 집을 짓고 11월에 그곳으로 가족을 데리고 들어갔다. 갑인년
예송 논쟁에서 서인이 패하자 영의정이었던 백부 김수흥(金壽興)이 조정에서 쫒겨났다.
그 뒤를 이어 좌의정에 임명된 부친 김수항 역시 영암, 철원으로 유배되자 맏아들인
김창집은 과거를 포기하고 영평의 백운산 아래로 가족을 데리고 들어갔다. 이때 농암도
영평 응암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이렇게 한창 나이에 정쟁의 소용돌이를 피해 조용히
은거했던 곳이 바로 백운산 자락이었다.
바닷가 암자에서 흡연 스님을 다시 만나니 눈 덮인 산사에서 밤새도록 들리던 선송 소리,
스님과 나눈 도담과 정표로 써 주었던 불경에 남긴 글씨까지 20년 세월을 순식간에
거슬러 그 겨울밤의 추억이 오롯이 되살아났다. 흡연 스님은 언젠가 농암을 다시 만날 줄
알았던 것일까? 농암의 필적이 고스란히 남은 낡은 『전등록』을 꺼내 든 스님도, 그
책을 얼른 알아보지 못한 농암도 흐르는 세월 앞에서 한동안은 망연했으리라.
그대가 소를 타고 아니 왔던들- 김창협
『농암집』권1
寒山朝霽好 (한산조제호) 싸늘한 산 아침에 하늘이 개어
一望興悠哉(일망흥유재) 눈 들어 바라보니 아련한 흥취
不有騎牛過 (불유기우과) 그대가 소를 타고 아니 왔던들
那成並馬來 (나성병마래) 말고삐 어찌 함께 몰고 왔겠나?
路侵氷澗轉 (로침빙간전) 산길은 언 시냇가 따라서 휘돌고
菴對雪峯開 (암대설봉개) 임잔ㄴ 흰 봉우리 향해 트였네.
偶値高僧講 (우치고승강) 우연히 고승 만나 토론하느라
因之宿未迴 (인지숙미회) 돌아가지 못하고 지새는 이 밤.
눈이 그친 뒤 맑고 찬 겨울 공기를 가르며 소와 말을 타고 백운산을 오르는 모습,
스님과 한방에 앉아 담소를 나무며 긴 밤을 지새우는 농암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시이다. 훗날 또 어딘가에서 두 시람이 해후하였을 지도 모를 일이나 오직
농암이 두 보문암에서 남긴 한시만이 두 사람의 특별한 인연을 전해줄 뿐이다.
한시 러브레터. 강혜선
(주)도서출판 북멘토.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