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으로 낮을 이어 술에 취해 놀아보세- 이행
밤으로 낮을 이어 술에 취해 놀아보세- 이행
八日觀燈約 (팔일관등약) 초파일 등불 구경하기로 약속한 날
南山半月時 (남산반월시) 남산에 반달이 뜰 그때지.
告休吾自暇 (고휴오자가) 휴가가 나는 절로 한가하니
卜夜子能期 (복야자능기) 밤놀이을 그대는 약속할 수 있겠는지?
嵓帶雲栖迹 (암대운서적) 바위는 구름 깃든 자취 띠었고
松殘鶴踏枝 (송잔학답지) 솔은 학이 밟은 가지 시들었네.
相逢須酩酊 (상봉수명정) 서로 만나면 흠씬 술에 취해야지
後乘載鴟夷 (후승재치이) 뒤 수레에 술 부대를 싣고 노세.
작품해설
4월 초파일이면 불자가 아니더라도 등불을 보러 산사에 가고 싶어진다. 화려한
현대의 야간 조명과 달리 짚은 어둠 속에 은은하면서도 화사하게 불 밝힌 등불
꽃밭은 정말이지 매력적인 풍경이다.
한 시인이 멋에게 등불 구경을 가자고 청하는 편지시가 있다. 시를 보낸 이는
조선 중기 최고의 시인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이행(李荇. 1478~1534)이요,
시를 받은 이는 후세에 소인배로 길이 기억되는 남곤(南袞.1471~1527)이다.
남산에 반달이 뜨는 초파일 날 등불 구경 함께하기로 약속하자는 내용의 시이다.
맘으로 낮을 이어 밤새도록 어울려 술에 취하고 등불에 취해 놀아보자고 하였다.
이어지는 시를 보면 이즈음 남곤의 사정을 짐작해볼 수 있다.
사화에게 주어 등불 구경을 약속하다
贈士華約觀燈 (증사화약관등) 三首. 『용재집(容齋集)』권2
平生南萬里 (평생남만리) 평생의 친구 남만리를
不見二經旬 (불견이경순) 못 본 지도 이십 일이나 지났구려.
眠食今何似 (면식금하사) 침식은 요즈음 어떠하신가?
風流老自新 (풍류노자신) 풍류는 늙어서 절로 새롭다네.
短轅頻晝駕(단원빈주가) 작은 수레를 낮에 자주 타고 와
良藥要時陳 (양약요시진) 약이 될 좋은 말을 때로 해야지.
莫惜來同醉 (막석래동취) 술 마시러 오길 아까워 마오.
吾儕亦故人 (오제역고인) 우리들은 역시 오랜 친구이니.
이행은 벗 남곤을 남만리라 부르고 있는데, 거기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남곤의 집은 서울의 삼청동 깊숙한 곳에 있었다. 그 앞에는 산 개울물이 흐르고
뒤에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들의또 다른 벗인 막은(朴誾. 1479~1504)이
집주인인 남곤을 놀리느라고 그 시냇물을 '만리 밖 개울물'이라는 뜻의 만리뢰
(萬里瀨)라 하고 바위를 '크게 숨어 있는 바위'라는 뜻의 대은암(大隱巖)이라
이름 붙였다.
남곤이 벼슬하느라고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돌아오므로, 문 앞에 있는
시내도 만리 밖에 있는 것처럼 멀고, 집 뒤에 있는 바위도 알지 못하기 때문
이었다. 아무리 조정의 일이 바쁘더라도 초파일에는 남산에 올라 등불 구경도
하고 술도 마시고 흉금도 털어놓고 애랴 하지 않겠나며 벗 남곤에게 청하였다.
벗과의 약속을 어긴 남곤이 훗날 1519년 심정 등과 함께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김정 등 신진사림파를 숙청한 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희빈 홍씨를
이용해 "온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다"고 왕에게 밤낮으로
고하여 왕의 마음을 흔들고, 궁중의 나뭇잎에다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
이라고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한 뒤, 그 문자의 흔적을 왕에게 보여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리하여 남곤은 천하의 소인배로 역사에 길이
그 이름을 전하게 되었지만 그도 젊어서는 시인이었다.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두 시인 박은과 이행이 바로 남곤의 절친한 시우였으며,
허균의 『국조시산(國朝詩刪)』에도 남곤이 젊은 날 지은 한시 여러 수가 올라
있을 정도다. 친구를 멀리하고 시를 멀리하면서 점차 권력의 이면이기도 한
권모술수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간 한 인물의 여정을 미리 내다볼 수 있게 한
시가 바로 이행의 등불 구경을 약속하는 시이다.
한시 러브레터. 강혜선
(주)도서출판 북멘토.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