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을 때려 부수니 안팎이 없어지고 - 나옹 혜근
허공을 때려 부수니 안팎이 없어지고 - 나옹 혜근
擊碎虛空無內外 (벽쇄허공무내외) 허공을 때려 부수니 안팎이 없어지고
一塵不立露堂堂 (일진불립로당당) 티끌 하나 없는 자리 뚜렷하게 드러나네.
翻身直透威音後 (변번직투위음후) 돌아서서 곧장 태초부처님 뒤를 꿰뚫으니
滿月寒光照破床 (만월한광조파상) 보름달 서늘한 빛 낡은 침상을 비추네.
懶翁 慧勤 (1320~1378)
- 고려
작품해설
- '도'를 깨닫는 것을 '깨친다'하니, 깨뜨리고 나온다는 말이다. 無明의 굳은 껍질을
깨뜨려야 지혜가 열려 밝은 빛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다. 나옹스님은 마음의 '무
명'을 깨뜨릭 위해 안으로 들여다보는 길이 아니라, '허공'을 때려 부수는 바깥으
로 향한 길을 보여준다.
- 나옹스닌미 깨부수려 한 '허공'은 두 가지 뜻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천지 만물을
모두 담고 있는 바깥 세계의 전체를 이루는 공간으로서의 '허공'일 것이다. 바깥
세게를 의식하면서 인간은 분별의 사유를 하게 되고, 너와 나(彼我)를 나누고 안과
밖(內外)을 나누고 아름다움과 추악함(美醜)을 나누고, 올음과 그름(是非)을 나누
니, 분별에 분별이 거듭되며 온갖 대립과 갈등이 일어난다. 이 바깥의 공간세계를
단박에 깨뜨리고 나면 온갖 분별이 모두 사라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그러나 '허공'에는 또 하나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불교에서 인간의 감각과
사유가 빚어내는 모든 현상의 세계를 깨뜨리면서 그 본질을 '허공'이라 한다. 그렇
다면 '허공'은 모든 현상적 존재 곧 '만유'와 상대되는 말이요, '만유'와 '허공', 내지
'유'와 '무'의 대립은 또하나의 안과 밖을 나누는 사유릐 형식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본질로서의 '허공'을 깨부수면 이제 현상과 본질의 분별이 사라져 안과 밖이 없어
지는 세계가 열리게 될 것이다.
- 나옹스님에게는 모든 분별적 사유의 세계를 깨부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또
하나 허물어야할 것이 있다. 곧바로 두 번째 공격 목표를 향한다. '태초에 부처님
(威音)'이란 부처님도 시간의 개념이 넓어지면서, 그 이전의 부처님 또 그 이전의
부처님을 찾다가 더 이상 처음이 없는 '태조의 부처님'이 설정된 것이다. 무량겁을
넘어서 '태초'를 설정하는 것은 시간의 단위로 추정이 불가능한 영원이다. 그러나
이 영원으로서의 '태초'도 뚫어야 한다는 것이다.
- 마지막 구절에서 '보름달 서늘한 빛'은 내가 보고 느끼는 '지금 이 순간'으 달빛이
요, '낡은 침상은 내 몸을 맡기고 있는 '바로 이 자리'이다. 이 순간 나의시각과 촉
각 속에 들어온 세계는 나의 이 한 몸을 뉘우고 있는 침상 바로 이 자리와 결함되
어 하나로 만나고 있다. 우주의 영원한 진리도 결국 돌아오면 '지금 이 자리'를 떠
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詩境 : 漢詩와 道」, 금장태, 禪詩의 세계
박문사,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