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雲의 배움터/漢詩 1

끓는 물도 얼음도 다 같은 물이요 - 지천 최명길

花雲(화운) 2018. 2. 28. 17:53


끓는 물도 얼음도 다 같은 물이요 - 지천 최명길

<用前韻講經權>



靜處觀群動 (정처관군동)   고요함 속에서 온갖 움직임 본다면

眞成爛熳歸 (진성란만귀)   진실로 원만한 귀결 이룰 수 있네.

湯氷俱是水 (탕빙구시수)   끓는 물도 얼음도 다 같은 물이요.

裘葛莫肥衣 (구갈막비의)   털옷도 베옷도 옷 아닌 것 없느니

事或隨時別 (사혹수시별)   일이야 혹 때를 따라 달라질 망정

心寧與道違 (심녕여도위)   마음이야 어찌 도리에 어긋나랴.

君能悟其理 (군능오기리)   그대 이 이치를 깨닫는다면

語默各天機 (어묵각천기)   말하거나 침묵함이 각각 천기라네.


遲川 崔鳴吉 ((1586~1647)

- 조선


작품해설

- 최명깅의 이 시에는 우리 역사의 급박하고 쓰라린 배경이 있다. 1636 12월 청 태종의

   대군이 압록강을 건넌지 불과 10일 만에 파죽지세로 서울에 몰려든 병자호란이다.

   왕비와 왕자는 강화도로 피난하고, 임금과 세자의 피난행렬은 강화도로 가는 도중에

   벌써 청나라 군대에 의해길이 끊어져 다급하게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 1637년 1월 말에 항복할 때까지 40여 일간 남한산성에 포위되어 버티고 있었다.

   그동안 조정의 신하들의 의견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예조판서 김상헌을 비롯한

   대부분의 신료들은 마지막까지 싸우다 함께 죽자는 주전파였고, 이조판서 최명길을

   비롯한 소수는 나라와 임금을 지키기 위해 항복해서 화친을 맺어야 한다는 주화파였다.

- 병자호란이 끝나자 김상헌과 이른바 척화삼학사(斥和三學士) 등 주전론자들은

   청나라 심양으로 붙잡혀 갔고,조선 정부가 명나라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당시

   영의정이었던 최명길도 1642년 심양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 이듬해 최명길과 김상헌은 감옥의 이웃 방에 갇혀 있게 되었을 때, 서로 오해했던

   것을 풀고 시를 주고 받으며 서로의 흉금을 털어놓았다. 이때 최명길이 김상헌에게

   주었던 시에서

 "그대 마음이야 돌 같아 끝내 굴리기 어렵고

   나의 도는 둥근 고리 같아 따르는 바에 합치하네"

   라고 하여, 원칙을 지키며 변하지 않는 자세와 상황에 따라 적응하는 자세의 차이를

   잘 대조시켜 보여주기도 하였다.

- 이 시의 첫째, 둘째 구절에서 "고요함 속에서 온갖 움직임 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고요함과 움직임은 본체와 현상, 원리와 현실을 표상하는 것이다. 원리와 현실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 만큼 양쪽이 일치하고 조화하는 세계를 볼 수 있어야

   무슨 일이나 원만하게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셋째, 넷째 구절에서는 이러한 원리와 현실이 서로 떠날 수 없는 관계를 물과 옷의

   구체적 사물로 비유하였다. 현실과 원리 사이에 어느 한쪽을 고집하여 다른 것을

   버릴 수 없다는 포용적 내지 통합적 인식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상황론은 언제나

   원칙론이 쉽게 버리고 있는 현실을 중요하게 거두어들여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한다.

- 다섯째, 여섯째 구절에서도 원리와 현실의 문제를 일과 마음의 문제로 대치시켜

   양자의 일치를 확인하고 있다. 곧 일이란 때에 따라 변하는 현실의 조건이라면,

   이 현실을 통제하는 마음은 언제나 도리를 벗어나지 않는 것임을 말한다.

- 인간의 마음이 일을 처리할 때, 항상 일은 시기라는 상황적 조건에 따라 변하지

   않을 수 없지만, 마음은 불변의 기준인 도리를 지키면서 이 상황적 조건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 상황론의 기본 입장임을 제시해주고 있다.

- 마지막 일곱째, 여덟째 구절에서는 결론으로 상황론의 이치를 이해하기를 요구한다.

   곧 상황론에 따르면 말하는 것과 침묵하는 것처럼 서로 전혀 상반된 조건에 놓여

   있더라도 어느 한 쪽이 옳은 것이 아님을 주목하고 있다.

- 최명길의 상황론은 단순히 시기와 상황에 적응하는 현실 영합적 태도가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어떤 현실에 적응하더라도 그 근거에는 항상 도리와

   원칙이 기준으로 확립되고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현실의 변동이 급박하게 요동치고 있는 상황에서 원리의 기준을 확고하게 지키며

   대처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이상적 상황론이다.



「詩境 : 漢詩와 道」, 금장태, 한국 한시의 세계

 박문사,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