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3
동양의 궁궐능 보통 정전을 남향으로 하여 남북 중심축을 따라 건물을 엄격하게 배치하는데,
창경궁의 중심 부분은 특이하게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고려 때 동향이었던 것을 존중했다고도
하는데, 입지 여건상 동향으로 짓는 것이 지형에 더욱 자연스럽고 적합했기 때문인 듯하다. 이처럼
창경궁은 자연 지형을 고려하면서도 기능과 용도에 따라 생활의 편의를 추구하여 조성했기 때문에
아름다움과 친근함을 두구 갖춘 궁궐이 되었다. 창경궁은 임진왜란 때 서울의 다른 궁궐과 함께 불에
탔다가 1616년(광해 8)에 재건되었다. 이때 재건된 명정전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전 건물이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내전 건물들은 1830년 환경전 화재 이후 1834년(순종 34)에 재건된 것이다.
그러나 왕조의 상징이었던 궁궐은 일제의 '훼손'에 의해 왕궁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게 된다.
1907년부터 창경궁 안의 건물들을 대부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여 일반에 공개하였으며,
1911년 이름마저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다. 쪼한 종묘와 연결된 부분에 도로를 개설하여 맥을 끊었다.
1983년부터 동물원을 이전하고 본래의 궁궐 모습을 되살리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아직 많은 전각을 복원하지 못했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진 창경궁의 모습에서 왕실 생활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춘당지(春塘池)
왕이 농정을 살피던 곳
춘당지는 현재 두 개의 연못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뒤족의 작은 연못이 조선 왕조 때부터 있었던
본래의 춘당지이다. 면적이 넣ㅂ은 앞쪽 연못은 원래 왕이 몸소 농사를 행하던 11개의 논이었다.
이곳에서 임금이 친히 쟁기를 잡고 소를 몰며 논을 가는 시범을 보임으로써 풍년을 기워하였다.
1909년 일제가 창경궁을 파괴할 때 이 자리에 연못을 파서 보트를 타고 놀이를 즐기는 유원지로 만들었다.
섬은 1986년에 조성하였다.
통면전과 장희빈의 저주
궁녀였던 장옥정은 숙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고, 완자 균을 출산하여 희빈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숙종대는 조선 왕조를 통틀어 당파간 정쟁이 심했던 시기로, 왕은 자신의 여자들을 이용해 당쟁 속에서
왕권강화를 꾀했다. 균을 세자로 책봉하는 과정에서 서인을 격침하고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시켰다가,
서인들이 민씨 복위를 꾀하는 과정에서 남인들을 제거한다. 왕비까지 되었다가 다시 강등된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꼭두각시와 동물의 사체 등을 통명전 주위에 묻어 두었다. 이것이 발각되어
사약을 받으니 수많은 풍문과 일화를 남긴 채 4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사도세자의 비극
1762년 윤5월 13일 문정전 앞뜰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노론은 어릴 적부터
노론을 싫어했던 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자 위기감을 느끼고 영조에게 온갖 모략을 고했다.
노론 세력이었던 세자의 처가와 누이 화완옹주 등이 이에 함게하였고, 생모 영빈 이씨가 이날 영조에게
유언비어를 고하여 결국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기에 이른다. 문정전 앞뜰에 놓인 커다란 뒤주에
갇혀 한여름 더위와 허기로 8일 동안 신음하던 세자는 28세의 짧은 생을 비참하게 마감했다.
영조는 세자의 죽음 후 그를 애도한다는 의미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창경궁으로 돌아온 소현세자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불모로 잡혀갔다가 9년 만에 돌아왔다.
이때 백성들이 홍화문 앞까지 길을 가득 메우고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다. 청나라에 머무르는 동안
소현세자는 단순한 인질이 아니라 외교관의 역할을 해냈으며, 서양의 발전된 문물을 접하면서 장차
조선을 새롭게 변혁시키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었다. 그러나 귀국한지 두 달 만에 갑자기 병이 나, 병석에
누운 지 3일 만에 창경궁 환경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망 당시 소현세자는 새까맣게 변해 있었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고 한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청나라의 신임을 얻고 있던 세자를
독살했으리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임금과 백성이 만났던 홍화문
홍화문은 임금이 친히 나가 백성들과 대면하던 곳이기도 하다. 영조는 1750년 균역법을 시행하기 전에
홍화문에 나가 양반과 평민들을 직접 만나 균역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였다. 이때 대신들은 균역을
반대했지만백성들이 찬성하자 영조는 백성들의 의견을 따랐다. 정조는 1795년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홍화문 밖에 나가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는데 <홍화문 사미도(弘化門 賜米圖)>라는
기록화에 그 정경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옥천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