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雲(화운) 2012. 3. 11. 09:33

한양의 중심이었던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

경복궁은 1395년에 창건한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法宮. 임금이 사는 궁궐)이다.

북으로 백악산(지금의 북악산)을 기대어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 넓은 육조거리

(지금의 세종로)가 펼쳐진 한양(서울)의 중심이었다. 이후 확장과 중건을 거듭하다가 1952년에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소되고 말았다. 그 후 경복궁은 270여 년간 복구되지 못하고 방치되다가

1867년에 이르러서야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다. 중건한 경복궁은 50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이었다. 궁궐 안에는 왕과 관리들이 정무를 보던 외전과 관청들,

왕족과 궁인들의 생활을 위한 내전과 건물들, 휴식을 위한 정원 시설들을 조성했다. 또한 왕비의 중궁,

세자의 동궁, 고종이 세운 건청궁 등 크고 작은 궁들이 복잡하게 들어선 궁궐 복합체이기도 했다.

국권의 상징이었던 경복궁은 일제강범기 때 계획적으로 훼손되었다. 1911년에 경복궁 부지의 소유권이

조선총독부로 넘어갔으며, 1915년에는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다는 명목으로 주요 전각 몇 채를

제외하고 90% 이상의 전각이 헐렸다. 조선물산공진회를 계기로 일제는 경복궁을 본격적으로

파괴했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궐 자체를 가려 버렸다. 다행히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을

추진해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홍례문 일원을 복원했으며, 2010년에는 광화문이 원형복원되었다.

경복궁의 명칭

경복궁은 조선 왕조가 세워지고 3년이 지난 후 완공되었다. 완공된 지 며칠 후에 개국공신 정도전은 태조의 명에 따라 경복궁이라는 궁궐 이름을 비롯해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등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었다. 경복궁(景福宮)이라는 이름에는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임진왜란과 경복궁 화재의 원인

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모두 불타 버리는 비운을 겪는다.

1592년 4월 30일자<선조수정실록>에는 왕실과 조정이 서울을 떠나자 성난 백성들에 의해

'도성이 불탔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와 달리<선조실록> 5월 3일자 기사에는 왜군의 동태를 기술하면서

'이때 궁궐이 불탔다'고 되어 있어, 경복궁화재의 시점과 원인에 대해 엇갈린 기록을 보이고 있다.

당시 일본의 장수였던 오제키의 <조선정벌기> 5월 3일자에는 '안으로 둘어가 보니 궁궐은 텅 비었고

사대문은 제멋대로 열려 있었다. (중략) 그 아름다운 모습은 진궁(秦宮)의 장려함을 방불케하더라'라고 적혀

있어, 왜군이 들어오기 전에는 궁궐이 보존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의 상황과 문헌자료에

 근거해 볼 때 화재의 원인은 백성들이 아니라 왜군에게서 찾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고 하겠다.

 

옛 영화를 짐작할 수 있는 4대문 - 광화문

경복궁 바깥을 두른 담장의 길이는 2,404m에 달하고, 평균 높이는 5m, 두께는 2m 정도이다.

담장의 사방에는 4대문을 만들고, 1426년(세종 8)에 건춘문(建春門-동), 광화문(光化門-서)

영추문(迎秋門-서), 신무문(神武門-북)이라 이름 붙었다. 이는 각각 봄-여름-가을-겨울과

나무-불-쇠-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가운데 자리한 근정전을 중심으로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

전통적인 오행설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은 3개의 홍예문이 나 있는 높은 석축 위에 중층의 문루가 높이 앉아 있는

장려한 건물이다. 전면 담장의 두 끝 모퉁이에는 망루인 동십자각(東十字閣)을 세워 조선의 5대

궁궐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 형식을 갖추었다. 서십자학은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었고, 동십자각은

도로 확장으로 인해 담장이 안으로 들어가면서 궐 밖의 길 한가운데 홀로 서 있게 되었다.

 

옛 모습을 되찾은 궁궐의 중심-근정전(勤政殿)

근정전은 경복궁의 으뜸 전각인 법전(法殿, 正殿)으로 그 이름은 '천하의 일을 부지런히 하여

 잘 다스리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궐 안에서 가장 장엄한 중심 건물로 왕권을 상징하며, 왕의

즉의식이나 문무백관의 조회, 외국 사절의 접견 등 국가적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근정전에서 열리는 조회

근정전에서는 서울에 거주하는 모든 문무백관이 참여하는 조회를 한 달에 네 번 열었다.

조회에는 미관말직도 관복을 입고 모두 참여하였다. 품계석 앞에 신하들은 자리를 깔고 앉았는데,

자리는 품계에 따라 표범가죽, 호랑이가죽, 양가죽, 개가죽으로 차별을 두었다. 

근정전은 2단의 월대(궁굴전각 밑에 놓인 섬돌) 위에 다시 낮은 기단을 만들고 2층 건물을 올렸는데,

안에서 보면 층 구분이 없는 통층이다. 회랑으로 둘러싸고 평평한 돌을 깐 근정전 앞마당이 바로 조정이다.

남쪽 회랑에 근정문을 두었고 그 바깥에 다시 외행각을 둘러 또 하나의 마당을 조성했으며,

외행각 남쪽에는 흥례문(興禮門)을 내었다.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근정문 바깥 영역을

철저히 파괴했으나, 2001년에 흥례문과 외행각, 영제교 등을 복원하여 제 모습을 되찾았다.

근정전은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처마 밑의 그물과 오지창의 용도

근정전 처마 밑에 그물이 걸려 있는데 이를 '부시'라고 한다.

 새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옛날부터 사용하던 것, 새의 배설불로부터 목조건물인 궁궐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회랑이나 궐담 등 그물을 치기 힘든 곳에는 오지창을 꽂아 새들이 앉는 것을 막았다.